“그렇지만 모든 매혹은 똑같은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내면의 빈 곳에서 오거든요.”

그는 검지로 가슴을 쿵쿵 쳤다.

“뭐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채워야 하거든요. 책·그림·사람, 다 똑같단 말입니다….”

                        - 당 신 을 믿 고 추 락 하 던 밤(The Blindfold by Siri Hustvedt)


0. 매혹적인 이야기.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1. 첫문장에 붙들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완독한 게 얼마만인지. 격렬함 뒤 찾아오는 나른함이랄까. 책을 덮고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2. 각각의 단편 속에서 감수성 예민한 문학전공 대학원생 아이리스는 사랑과 예술, 이상적 자아와 낯선 자아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개성 강한 인물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인물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 흥미로운 점은 한 인물의 기행에 가까운 행태가 다른 이야기 속의 아이리스에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죽은 여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모닝 씨라든가 자아가 분열된 O, 기괴한 연출에 열중하는 조지의 모습은 아이리스가 스스로 발굴해내는 내면의 모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연작소설집이지만 마지막 수록작은 앞선 세 작품을 시간적으로 품고 있다. 불현듯 끝나버리는 엔딩이 앞선 세 단편에서는 매력적이었으나 마지막 단편에서는 다소간 허탈. 아이리스의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 듯하지만, 다른 결말들에서처럼 깊은 여운을 맛보진 못했다. 어쩌면 읽느라 지쳤는지도. 하지만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은 대부분 마지막 단편에 모여 있었다. 

3. 마지막 단편에서 아이리스가 그림을 묘사하는 대목. 첫번째 단편에서 모닝이 죽은 여인이 남긴 소지품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 기억을 기억하는, 사후의 삶.

"현실의 빛이 아니라 내면의 빛이랄까, 강력한 기억의 빛이에요.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지난 일처럼, 이미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마 그래서 나중에 그렇게 강렬한 효과를 낳나 봐요. 내 말은 그 사물 자체가 기억이고 사후의 삶이고, 그래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거라는..."


4. 소설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한 대목.  

"그 여섯 블록은 오디세이가 무색했다. 시각과 함께 평형감각이 사라졌고 나는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머릿속으로 한 블록 한 블록을 헤아려 전진했다. 마이클이 인도하려고 팔을 뻗었지만 난 그를 밀어내며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5. 때로는 한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둬야할 말도 있다. 

"말이 시간을 두고 가라앉아야 할 때가 자주 있죠. 있잖아요, 한동안 땅 속에 묻어두는 거."







0. <꿈의 해석을 읽다>를 드디어 완독. 대표적인 중화권 인문학자라는 '양자오'가 지었고, '유유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어쩌다 보니 올 들어 유유출판사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됐는데, 작가들이 하나같이 목소리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들려준다. 프로이트를 해설한 이 책 또한 무겁지 않다. 부제가 '프로이트를 읽기 위한 첫걸음'인데, 그 첫걸음으로 완벽하다! 쉽고 재미있다. <꿈의 해석>보다 더 재미있을까 봐 염려될 만큼 재미있다;;

작가는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그 인물이 놓인 '19세기 유럽'이라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배경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적 배경지식이 확장되며 당대를 풍미한 예술사조와 철학까지 훑게 되니, 이 자체만으로 풍성한 독서체험이라 할 만하다.

책은 들고 다니기에 딱 좋은 사이즈이며, 뒷날개를 접어 책갈피로 이용하게 만든 센스 또한 마음에 든다.

자자, 입문서도 읽었으니, 이제 십수년 간 책장에 꽂아만 뒀던 문제의 <꿈의 해석>을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설마 버리진 않았겠지?!

 

1. 오늘 내가 낚인 기사는, 한 유명 배우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사칭하고 자신에게 성적 모멸감을 준 네티즌을 고소한 기사였다. 정신병자, 관심종자, 스토커라고 질타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그의 지인이 남긴 듯한 댓글을 주목했다. 그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짓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의 블로그와 인스타까지 찾아봤다. 그는 자신을 킹메이커라고 믿고 있었고, 종국에는 대권을 잡으려는 야심찬 꿈을 꾸고 있었다.

 

2. 이상과 망상, 정상과 비정상,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요즘처럼 온갖 음모론과 피해망상이 널려 있는 시대에서는 이 경계가 매우 흐릿한 것 같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심리 기제의 운용이 다소 극단적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쪽에는 정상인이 있고 저쪽에 정신병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한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 이후의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내재된 정신질환을 자각했다.... 20세기 예술은 기본적으로 광기의 예술이자 정신분열적 예술이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을 의자에 눕히고 끊임없이 기억을 되돌려 자기 자신의 비참함과 내면의 어둠을 깨닫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의 괴물을 새기거나 그리거나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제거하고자 노력했고, 이로 인해 20세기 현대 예술이 출현했다. (p188-189)"


3. 어제 한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했다.

"그 책에 고등학생의 존속살해 사건이 나오거든. 실화야. 충격적인 뉴스여서 우리도 언젠가 듣긴 들었을 거야. 기억 안 나? 뭐 우리랑 상관 없는 이야기겠거니 싶어 아마 쉽게 잊었겠지. 일제고사 전국등수가 서울대에 들어갈 만큼 좋았던 얘였는데, 성적이 떨어져서 엄마한테 체벌을 받은 거야. 처음에는 회초리, 나중에는 골프채, 야구방망이, 뭐 이런 식으로 강도가 높아지다가 애를 며칠 씩 가두고 밥도 굶겼다네. 정신 좀 차리라는 뜻으로. 그러던 어느 날 이 애가 충동적으로 엄마를 살해한 거지. 사흘간 잠도 못 자고 굶고 매타작을 당했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애는 이해하지 못해. 일시적인 정신착란, 뭐 그렇게 된 거지." 엄마를 흥분시킨 그 첫번째 일제고사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 이 아이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아이는 평..했다고 했다.

 

4. 그 엄마도 평..한 여자였다고 주위 사람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5. 언젠가 고교시절 베프가 호들갑을 떨며 한 동창에 대해 말해줬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였다.

"같은반이 아니어도 알 만한데. , 서울대 갔잖아, 진짜 기억 안 나? 그냥, 평범해. 공부만 하던 얘였는데... 그게, 그만 실연하고 정신줄을 놨댄다. 무슨 상처를 어떻게 받았는지... 학교 그만두고 집에 와 있대. 연애를 얼마나 지독하게 한 건지. 그럴 얘가 아닌데."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인간은 모두 잠재적인 정신병 환자다. (p186)

무척 연약한 존재인 인간은 강한 억압을 필요로 하는 경험과 맞닥뜨리면 아주 쉽게 정신병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미치는 것은 실연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실연의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미칠 위험에서는 도리어 멀어질 수 있다.(p168-169)

 

6. 오래 전, 고등학생 때. 현관문 앞.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 사춘기였으니 모든 게 다 짜증스러웠겠지.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꽤 억눌려 있었다. 멱살 잡힌 채 끌려가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얘 왜 이러니,' 그런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감정을 폭발하는 순간에도 엄마의 표정을 예민하게 살폈고 이성이 멀쩡하게 작동하는 걸 의식하곤 내심 한탄했다. 왜 나란 인간은 이런 순간에 정신줄을 놓지 못하지. 확 놔버리면 좋을 텐데. 아주 시원스럽게 내질러버린다면, 엄마가 황당하게만 나를 쳐다보고 있진 않을 텐데. 내 감정을 좀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텐데. 엄마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집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다.

 

7.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프로이트의 입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 정신줄을 놓을 만큼 억압받진 않았던 거다. 고작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릴, 딱 그 정도 폭발할 만큼의 억압이었던 거다. 그저 전형적인 사춘기를 앓았을 뿐. 어쩌면 그 정도의 미약한 분출이라도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릎끓고 앉아 성경을 펼쳤는지도...

 

8. 틈틈이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들을 맞닥뜨리곤 한다. 길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뉴스와 풍문을 통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 나는 그게 언제나 궁금했지만 결코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저 너머의 일이니까. 비정상과 비현실의 세계에 내가 거주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그 세계가 만인에게 열려 있다고,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여기 도처에 입을 벌리고 있다고 느낀다. 수면 위로 3년만에 끌어올려진 세월호가, 그 처참하게 상처입고 돌이킬 수 없이 부식된 모습이, 이 세계와 우리 내면에 도사린 어둠의 은유 같다. 우리가 결국 '실패'했다면, 계속 '억압'당했다면, 끔찍하게 변형되고 뒤틀린 채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겠지. 1073일만에 심연 속에서 건져낸 건, 어쩌면 우리의 인간성인지도 모르겠다




         건물을 나왔을 때 생각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나는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도 마음이 가벼웠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카페와 박물관을 지나 작은 내천을 따라 걸었다. 공터마다 작은 아트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앙증맞은 액세서리와 수제 가죽가방 들, 다소 독특한 컨셉의 의류, 다양한 식자재로 만든 수제쨈과 식혜 들, 봄을 불러들이는 듯한 파스텔톤의 향초들. 띄엄띄엄 놓인 가판대 사이를 사람들이 한가하게 기웃거렸다. 옷을 구경하던 중년 여자가 다른 쪽에서 향초를 구경하는 친구를 호들갑스럽게 손짓하며 불러댔다. 그들은 소매에 날개가 달린 흰색 가오리 긴팔셔츠를 보며 예쁘다고 감탄했다. 그러자 내게 옷을 보여주던 젊은 여주인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원피스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실내복은 여주인이 권했던 것이었다. 나는 옷 자체보다 그녀의 말에 붙들려 있었다. 말을 재치 있게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그 원피스를 '분리수거'하러 나갈 때 입고 나간다고 했다. “넘 예뻐서 다들 깜짝 놀란다니까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따라 웃었다. “이거 대박난 옷이에요, 검은색은 이거 하나 남았어요.” 여주인이 다른 이들에게 간 틈에 나는 19,000원짜리 분리수거복을 행거에 그냥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때마침 아이가 나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르르 달려와선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딴 짓은 이제 그만 하자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러고는 자기만 따라 오면 길을 잃지 않는다면서 자꾸 남서쪽이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는 남서쪽으로 가야 해. 엄마는 나만 따라 와. 지난번에 엄마 때문에 우리가 엄청 헤맸잖아. 기억나지, 엄마?” 우리는 대충 남북을 가늠한 뒤 느긋하게 걸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북동쪽으로 걷고 있었지만 아이는 남서쪽'으로 맞게 가는 중이라 우겼고, 방위와 상관없이 직관적으로 걷고 있었으나 우리 모두 맞게 가고 있다고 믿었다


            단 둘이 산책하는 건 오랜만이었다다양한 연령대의 커플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걸었다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대기는 산책하기 좋을 만큼 적당히 데워져 있었다.햇빛에 섞여 노르스름하고 어쩐지 달고나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바깥 공기를 쐬면서 아이는 기분이 유쾌해진 듯했다. 표정과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 이상 무표정하게 시간을 견디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 시간 남짓 아이는 굳은 얼굴로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있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선 안내책자를 만지작거리던 아이. 앞을 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던 아이. "너 원하는 대로 해." 엄마에게서 선택권을 건네받았지만, 사실은 자발적으로 수업을 선택하도록 교묘하게 설득당해 버린 아이. 그때와는 다르게 아이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빛내며 주위 풍경을 살폈고 쉴새없이 조잘거렸다. 


           "엄마, 나만 따라 오면 돼." 

           엄마를 리드한다고 믿고 있을 아이의 기분을 생각해봤다. 

           아이의 '남서쪽'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