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백신이 백신 가운데 가장 효과가 떨어진다지. 알려져 있다시피, 독감 바이러스가 계속 변하고 있는 데다가 그해 유행할 균주를 추측하여 백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독감 백신을 맞히지 않았다

 

올 겨울 나는 그걸 조금 후회했는데,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독감에 걸렸기 때문이다. 올 겨울은 독감이 유난을 떨었다. 아이네 반의 경우에는 1/3이 독감을 앓았다. 아이가 다행히 크게 앓지는 않았지만아이도 나도 일주일 간 집안에 격리되다시피 했기에 하필 그 기간에 잡혀 있던 중요한 일정들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승률이 매우 낮은 게임이 아닐까 여전히 생각했다.

 

<스켑틱> 코리아판 8권에 실린 독감 백신에 대한 컬럼을 읽고서 나는 다른 관점으로 독감 예방 접종을 바라보게 됐다. 감염성 질환 전문가 마크 크리슬립은 독감 백신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에 맞서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인구 집단이 받는 혜택은 백신을 맞는 개인에 의존한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공동체 안에서 독감의 전파 속도를 낮추어 집단 면역성을 높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유아, 면역계가 약화된 사람, 임산부, 노인을 위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할머니를 위해 독감 백신을 맞으세요."

 

그러게, 올 겨울에는 나도 독감 백신을 맞아볼까

 

인간은,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 내가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니므로, 또는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므로 무심코 내려지는, 나라는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개인의 결정들이 결국 어떻게든 바깥세상에 영향을 준다.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크게 퍼져나가는 파장. 그건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지

몇 개월째 그걸 사뭇 초현실적힌 형태로 목도하는 것 같다.


             




게일 레빈의 평전, <에드워드 호퍼:빛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를 읽고 있다. 뒤늦게 두번째 시도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오래 전, 호퍼의 그림에 처음으로 매혹당한 즈음에 읽다 지쳐 덮은 모양이다.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평전이니, 앞으로도 몇 번 더 벌어질 일일지도...

  

 

나이트호크(1942). 호퍼는 이 작품을 통해 이른바 미국식 리얼리티를 창출해냈다. 그가 이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 부부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조는 지인에게 고백한다.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 누군가의 손을 빌어 남겨진 소크라테스의 어록 탓이다. 그녀로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자신을 변호할 길이 없다.

호퍼는 아내 조를 '나의 크산티페'라고 불렀다. 조는 크산티페와는 달리 자신을 철저하게 변호했다. 미래의 독자를 다분히 의식해 쓴 일기를 남긴 것이다. 이들 부부의 경우에는 호퍼가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 심지어 그녀를 비꼬아 그린 듯한 연필스케치까지 남긴 마당에. 단지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 시대배경과 그의 기질, 그가 남긴 인터뷰와 편지, 그리고 그의 작품 등으로 그의 심리상태를 짐작할 따름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재독을 통해 내게 강렬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에드워드 호퍼가 아닌 조 호퍼다. 이 책이 조의 디테일한 일기를 밑천 삼아 쓰여진 탓도 있지만, 내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기혼여성이라는 스텐스를 내내 의식한 채 평전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 며칠 영드 <닥터 포스터>에 빠져 있어서인지도.

 

 

방영 천만명의 시청자수를 기록했다는데 왠지 그 중 9백만은 기혼여성일 것 같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앞두고서 여주의 행보(아마 복수의 방식)에 대해 댓글이 구백만개나 달렸단다.

 

각설하고, 호퍼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지극해도 이번에는 조에게로 시선이 간다.

예술가적 자의식과 아내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몇몇 고백은 그로부터 반세기나 훌쩍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일기장에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채 쓰여질 것 같다.

 

- 매 끼니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일은 나를 지독한 하이에나로 만들었다.


- 한때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고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았는데지금은 나 자신이 부엌데기일 뿐이고 어디에도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 부엌데기의 책임과 다른 생활은 없이 그저 피로와 심술 그리고 성가심으로 가득 차 있다.

 


1939<독립적 여성>이란 잡지에 "당신과 당신의 자동차"란 글이 실렸다. 제럴딘 사테인은 "자동차 운전의 성공에서 오는 힘에 대한 자의식"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달걀 거품기를 다루는 것보다 무한하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서글프다. 하다못해 오븐도 아닌 달걀 거품기라니...)

 

 

Jo in Wyoming(1946)

 

당시 조에게도 운전을 마스터하는 게 중차대한 미션이었다. 어디든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뜻했다. 그리고 "남편의 요구, 취향, 두려움으로부터 제한 받지" 않는 길이기도 했다. 조의 운전으로 빚어진 부부싸움이 '육탄전'(맙소사!)으로까지 빈번하게 확대됐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와 생물학적, 심리학적 동등성을 달성"하려 했던 한 여성의 욕망과 관계/힘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남성의 불안이 운전대를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조는 1944년도의 일기에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충동"으로 세가지를 뽑았다.

"미술을 통한 표현, 성 그리고 운전."

 

특히 운전과 미술에 대한 '충동'은 갈등의 주된 테마였다. 조는 호퍼가 자신의 미술 본능을 미묘한 방식으로 죽이는 것처럼 여겼다. 어느 날에는 호퍼가 미술관 직원에게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 자기 아내로만 소개했다고 조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녀의 일기 속에서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부엌데기처럼 여겨져 크게 화내다가도 그런 감정발작에 죄의식을 느끼고는 그래도 "내 사랑하는 에디는 집안일을 함께해 주잖아" 하고 자신을 위로한다. 그리고 아무도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남편의 면박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작품들을 갤러리로 보내곤 한다. 침체기에 빠져 까칠해진 그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날이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 인간이라고 일기장에 성토하다가도 그가 성공적으로 다시 작업에 임하면 깊이 안도한다. 사람들을 꺼리는 남편 대신 그의 작품을 평단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캔버스 앞에서 그가 요구하는 다양한 포즈를 적극적으로 취하며, 그가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 언제나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머물 곳이 앉을 데도 없는 부엌과 침실 뿐이라면서 한탄한다.

 

평전에서 언급된 조의 일기를 읽다 보면 '전쟁 같은 사랑'이란 말이 불쑥 떠오르곤 했다. 격렬하게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어물쩡 넘어가는 일이 평생 반복되는 것 같았다. 여느 부부 같으면 십년이면 적당히 포기하고 살 텐데, 이들 부부는 각자 동일하게 지닌 예술가적 자의식과 욕망 때문인지 끝도 없이 서로를 밀치고 끌어당긴다. , 아직까지 읽은 바로는 그렇다. 여하튼,

 


   호퍼 그림 속에 빈번하게 드러나는 '고독'과 '단절'의 이미지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운전대와 방 하나만 내줬다면,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 방향과 표정의 온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철로 변 호텔, 1952, 캔버스에 유화

 

 

뉴욕의 방, 1932, 캔버스에 유화

 

 철학으로의 소풍,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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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란 인간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쓰릴러도 그 결말을 확인하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평전의 마지막을, 호퍼의 마지막 그림과 그녀의 마지막 일기를 미리 훔쳐 봤다.

 

 

두 명의 희극배우, 1965, 캔버스에 유채

 

호퍼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두 명의 희극배우>에서 자신과 함께 조를 피에로로 등장시킴으로써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와 영예를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그녀가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 조는 여전히 정물화를 그렸다. 그리고 호퍼가 죽은 뒤 채 10개월도 되기 전에 84세의 나이로 죽었다. 내가 건너 뛴 어느 페이지에선가 그들은 평온해졌나보다.

 

그녀는 이렇게 일기의 "마지막 장을 접는다."

 

나는 내 자식들(조의 작품들)로 가득 찬 9제곱미터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다. 거기에 내 삶의 기록이 있다. 나는 여기저기서 편안함을 느끼고, 다시 살고, 작은 새끼들과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여성들이 미술보다는 사람들과 삶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배웠다. 그들은 두 가지를 다 가져야 한다.

에디가 떠나면 나는 지구상에 혼자다. 그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우리는 가까운 친구도 없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우리의 작은 집이 천국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모든 단순한 것들.

저 조용한 동반자는 잠자러 갔다. 그는 내가 글 쓰는 걸 미워하거나 내가 말하는 것에 참견하지 않는다.


2.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애니, 영화, 광고 속 장면으로 다양하게 패러디되었다.




 



 

 

 

 

 3. 사우디 정부는 아직도 여성들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9월호를 읽었다.

 

 

 

2015년에는 캘리포니아오징어의 알이 멀리 북쪽 알래스카 주에서도 발견됐다고 한다. 아열대 해양 동물인 개복치와 조개낙지와 청새리상어가 태평양으로 이동했고, 중앙아메리카의 바다뱀들이 LA 근처 해변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물을 찾아온 귀상어들이 캘리포니아주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영화 언더 워터(The Shallows)의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멕시코 해안에서 서핑을 하다가 난데없이 상어와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Surfin' USA가 명랑하게 울려퍼지는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단지 생태계 지도만이 바뀐 건 아니다. 크릴새우가 급격하게 줄어든 바람에 최소 10만 마리의 작은 아메리카바다쇠오리와 수십만 마리의 바다오리가 굶어 죽었다.

 

 

 

북동 태평양의 해수 온도가 기이하게 상승한 건 2013년부터이다. '블롭'이라 새로 명명된 이 수역에서는 약 2년간 생태계가 교란됐다. 많은 기상학자와 해상학자들이 기후 변화로 닥칠 미래의 바다를 이곳에서 예견했다. 따뜻한 기온으로 어류의 신진대사가 촉진돼어 식욕이 왕성해졌다. 먹잇감은 감소됐다. 먹이사슬 위쪽을 차지한 조류와 해양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고래와 해달 같은 동물들도 떼거지로 기이한 죽음을 맞이했다. 수심 깊이까지 높아진 수온으로 독성 해조류가 창궐했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신경독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의심하고 있다.

 

 

 

불과 한달 전 포털 한 켠을 소심하게 장식했던 뉴스 한토막이 떠올랐다. 한강을 녹차라떼로 둔갑시킨 유해 남조류는 내시와 사랑에 빠진 어린 왕의 순정한 눈빛 만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채 수심 깊이 가라앉았다. 혹독한 무더위가 몇 주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던 여름이었다. 녀석은 악랄한 고리대금업자처럼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가 전기세 고지서 한 장 던져놓고 떠나갔다.

 

2016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더위는 이제 물러갔다. 2013년 난데없이 시작된 북동태평양의 블롭 또한 강력한 엘니뇨로 약화되었다. 뉴욕 양키스, 요기 베라가 말했다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상한 나날은 이제 끝난 듯 보이나, 이제 막 시리즈를 기세좋게 열어젖힌 공포영화의 엔딩처럼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후속편은 언제나 강도가 더 센 장면들과 함께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상기온으로 나는 고작 몇 주 고생했을 뿐인데, 북동태평양의 해양생물들은 무려 2년이나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Into the Forest>는 종말에 가까운 세상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두 자매. 언니의 오디션과 여동생의 대학입학시험을 며칠 앞두고 미 서부지역에서 원인 모를 단전사태가 벌어진다. 곧 미국전역에서 발전소가 멈춘다. 모든 통신망이 단절된다. 유일한 이동수단은 자전거밖에 없다. 물자를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은 약탈을 일삼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사고로 죽는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기 전, 마치 동앗줄을 움켜쥔 것처럼 자매는 일상을 변함없이 이어나가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니는 매일같이 춤을 추고 여동생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우연히 초콜릿과 껌 두 개를 발견한다. 생애 마지막으로 맛보게 될지 모를 초콜릿 한 알. 그녀는 몇 번 언니를 건성으로 부르다가 아주 천천히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간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입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조금만, 아니 절반만. 그녀는 작은 초콜릿을 이로 살짝 깨물려다 멈칫하더니 그만 입 안에 넣어버리고 만다.

 

나는 바로 그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책장이 너무 빨리 넘어간다. <1Q84>로 이어지는 하루키의 원더랜드와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의 괴이한 실체가 모두 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단편과 장편들에서 참으로 알뜰하게 재활용되고 확장되는 세계와 인물과 상징들.

 

언젠가, 아마도 곧, 무라카미 하루키 옹은 마지막 책을 내놓게 될 테지. 그때를 대비하여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들이 책장에 몇 권 남아 있다. (고백하자면, 재미없을 것 같아 남겨둔 책들이라는...)  






  열림원에서 출간된 책의 뒷날개에는 그의 당시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속 그는, 젊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젊은이처럼도 보인다. 



    어멋. 하루키에게 얇고 섬세한 속쌍거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