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한 친구는 삼위일체설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아서 나를 따라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올해 5학년인 딸아이는 신을 지나치게 인격화시킨 나머지 신의 성정체성과 인종정체성을 헷갈려하면서 신성과 인성의 개념을 마구 뒤섞고 있다. 언젠가 아이가 그려낸 신이 (심지어 그리스신 제우스도 아닌)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느낌이라 무슨 하나님이 이렇냐며 큭큭거렸는데 아이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해서 그 뒤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호흡한 나머지 내 신앙이 내 정체성의 기반인 것은 맞으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에 비하면 그 신앙은 여물지 못했다. 내 믿음은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는 하나 손에 잡히지는 않는 연무처럼 가끔 피어오르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그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타고난 기질상 논리적이지 못하고 직관적이며,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각 잡힌 세상보다는 우연과 필연이 성기게 짜여 틈새 많은 세상을 깊이 아낀다. 그러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속 깊이 결론은 내려졌던 것이다. 그건 애초부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하는 내 빈약한 언어로는 신을 말할 수 없다, 라고.

 

그렇다 해도 신과 종교에 대해 묻는 딸아이의 요구를 맞닥뜨리면 나 또한 이해가능한 언어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에게

 

라틴 신학의 아버지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으면 안다"라고 표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이다"라고 가르쳤으며, 또 안셀무스는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라고 (p60)

 

말하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내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이것이 내가 받은 대답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실망하고 회의했기 때문이다.

 

2014416일 이후 나는 깊이 의심했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거의) 전 국민이 기적을 바라며 사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 가망 없는 나라를 떠나고 싶었고 기적을 호소하느라 몸과 정신과 삶이 피폐해졌을 부모들을 떠올리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는, 나 같은 쭉정이 신자가 아니라 신실한 기도로 아이를 키웠을 부모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다고 울부짖진 않을까. 아니면 그 참혹한 시절도 기도의 힘으로 통과해냈을까.

 

구약성경의 '욥기'는 욥이라는 한 정의롭고 신실한 인간에게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비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모든 비극을 맞닥뜨린 인간. 재산과 명예와 가족과 건강과 친구들을 순차적으로 잃고 결국 신에게도 버림받았다고, 이것은 신이 주는 벌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절망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약한 나는 욥기를 읽지 못한다. 읽고 싶지 않다.

 

 


얼마 전에 영화 <곡성>을 보았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탄식이 나왔다. 누가 선인지 악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도 악이 더 강해서도 아니라 인간이 그저 나약해서였다. 속수무책이었다.

 

 


영화 <곡성>에서 종구(곽도원)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괜찮아, 우리 효진이. 다 꿈이야. 아버지가 다 해결할게." 꿈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엔딩컷을 보고 일어서는데 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아무리 그 이유를 물어도 그 답을 들을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죽음은 무명이 매섭게 짚어준 종구의 죄처럼 그 원인이 보이며 어떤 죽음은 일광이 심드렁하게 말했듯이 그저 운나쁘게 벌어진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시기와 방식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맞게 될 필연적 소멸. 어느 누구도 그 소멸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시기와 방식만 바뀔 뿐이다. 그걸 굉장히 무참한 방식으로 두시간 삼십분 동안 목도한 것 같다.

 

영화의 후유증은 꽤 컸다. 영화가 주는 쟝르적 쾌락은 컸으나 영화가 담고 있는 메세지를 아무리 궁굴려봐도 허탈함과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건 어린 시절, 욥기를 처음 읽고 난 뒤의 마음과 비슷했달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현혹당하여 의심하고 분노하다 불신하고 절망하는 것밖에는 없는가. 의심과 현혹과 불신이 죄의 미끼이며 그 결과가 참변밖에는 없다면 (영화에서는 왜 하필 내 딸이냐고 절규하는 종구에게 무명은 네 딸의 아비가 의심하는 죄를 저질러서라고 답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예정되었다. 의심과 현혹과 불신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얼마나 많을까. 그 믿음이 신실하고, 타고난 기질이 강건하다 해도 곧 현실로 닥칠 자식, 아니 온가족이 맞게 될 참혹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 있었다. 그게 욥이었다. 그리고 욥은 믿음의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 허나 어린 마음에 나는 선한 인간을 악이 시험하도록 놔둔 신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욥과 같지 못한 나는 악의 손에 놀아나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울부짖으며 결국 신을 의심하고 책망할 것이며 그 죄로서 버려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뒤 의도적으로 욥기를 피했다. 회의하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꼈던 어린애였다. 의심을 하다 보면 "내가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묻다가 필연적으로 신의 실재를 묻게 될까 봐 그렇게 불신자가 될까 봐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그건 내가 딛고 선 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르지 않았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 8점
김용규 지음/휴머니스트

 

곡성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장에서 그 책부터 찾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나는 많은 질문에 시달렸고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그때 발견한 책이 하나 있었다. <곡성>이 다시 촉발시킨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그리고 누군가의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가 맞닥뜨릴 실존적 질문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김용규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은 타계하기 전 가톨릭 교회의 신부에게 24개의 질문을 써서 보낸다. 이 질문지는 한때 신부들 사이에서 돌았고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질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내놓은 실존적 물음들이다. '''존재의 근원', '종교', '영혼', '사후 세계' '선과 악' '종교와 과학' '종말' 등에 대해 이른바 '백만장자'는 날카롭게 묻고 있다. 그리고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이용규가 '종교적 관점과 언어'가 아닌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답한다.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롭다. 하지만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하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뒤를 이은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토마스모어, 기욤 부데 같은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작업을 담아낼 고유의 글쓰기 방법을 개발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 내려온 인문주의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적 양식이 있다.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을 끌어다 활용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회장의 질문들에 대해, 되도록 이 방법을 따라 답하고자 한다. (p13)

 

종교의 교리를 따져 묻던 그 옛날의 친구처럼 이제 본격적으로 신에 대해 묻기 시작한 아이처럼 누군가가 내게 다시 묻는다면 신앙이 여물지 못한 나는 인간의 언어로 답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믿으라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신의 언어가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제껏 내가 발견한 인간의 언어 가운데 최선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악을 처단하고 살아남은 주인공 뒤로 흐릿하게 드리워진 불길한 기운처럼 불안과 두려움이, 근심과 걱정이 내 머리맡을 찾아온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선악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이라면,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심한 사람의 신발 밑창에 언제 깔려 죽을지 모르는 개미와 다를 바 없다면, 우리의 매일의 안녕을 위한 기도가, 정의와 선에 대한 갈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도, 어쩔 도리 없이 기도하게 된다. 한밤중에 깊이 잠든 아이의 작은 머리와 여린 어깨와 마른 등줄기와 햇빛에 여문 손을 쓰다듬고 있으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너무도 약한 존재처럼 여겨져서 기도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끝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그 속에 그려진 세계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거다. 잠시만, 조금만 더 머물고 싶은 이야기. 심지어 주인공에게 고난이 첩첩산중으로 이어져서 지켜 보는 내내 옷자락 끝을 둘둘 말며 마음을 조아리더라도. 그 결말은 '주인공의 탈출'인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다. 

 

     메인 테마곡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이며 (해리 포터), 절반이 남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인셉션), 러닝타임이 길어 감사하고 (인터스텔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이 혼미해질만큼 휘몰아치며 (매드 맥스), 끝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영화들. 관객을 그 지경으로 몰고가는 데는 연출이나 배우의 힘이 결정적이겠지만, 재미있는 스토리가 지닌 원초적인 힘이야말로 절대적이다. (매드 맥스는 연출의 힘이 90%라고 생각합니다만 ㅠ.ㅠ 존경해요, 감독님... 남은 10%은 샤를리즈 테론의 힘. 언니, 사랑해욧.)

 

    각설하고, 주말에 본 <마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몇 주 전부터 책을 먼저 읽을까, 영화를 먼저 볼까 망설이던 참이었다. 요즘 너무 지르고 다닌 탓에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려 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들어오자마자 예약자 7명이 줄을 섰다. 옆 동네 도서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인스타의 #북스타그램을 검색해보면 <마션> 사진이 주루루 뜬다.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재미있다!" 이러면 기대감이 고조될 수밖에.

 

    영화 <마션>은, 좋았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중에 한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단지 끝나는 게 아쉬울 만큼 이야기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몇몇 장면들이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만치 아름다웠고, 명대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가령,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죽었다고 부모에게 전해달라는 주인공의 말은 지금 생각해 보면 손가락이 오글거리며 낯뜨거워지는 것인데도 듣는 그 순간에는 울컥했다.) 게다가 맷 데이먼이 연기한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는 내 이상형이었다. 이상적 남자가 아니라 이상적 인간.

 

    요즘 나는 '감정을 통제하고 자신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쩍 드리곤 한다. 그때마다 부여잡는 말씀은,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신4:9),"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내 일생 일대의 과제처럼 느껴진달까. 하지만 어떻게? 가령,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황무지에 나 홀로 내팽개쳐져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고 죽음이 목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 내가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크 와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 채 선포한다. 

    "난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우주에선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시작하는거지."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규율을 준수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제어하고 유지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규율을 세우고 할 일을 세분화하여 당장 시작하기,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지키기. 그것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둥지를 짓고 알을 품을 수 있도록 나를 도울  것이다. 물론 그런 핼시온 데이즈 halcyon days야말로 간절한 마음에 대한 신의 응답이며 선물일 거라 믿는다.   

 

    쓰다보니 유쾌하기 짝이 없는 오락 영화를 점잖은 휴먼 드라마로 각색해버린 것 같다. (맷 데이먼이 다소 정상적인 캐릭터로 연기한 것과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사차원 괴짜 캐릭터가 시덥잖은 유머를 시종일관 터뜨린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기대치 않게도 마음이 훈훈해진 게 사실이다. 심지어 울며 겨자먹기로 영화관에 끌려갔던 J는 이렇게 고백했다.

   "엄마, 아빠가 보자고 했던 영화들이 처음에는 거의 다 보기 싫었거든. 근데 보고 나선 다 좋았어."

 

   남편과 내가 의기양양해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핫.   

 

 

 

덧 1. 마크 와트니의 또 다른 명대사. 

 

 “삶의 어느 지점에서 정말 모든 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을 칠 때가 있지. 그래. 이게 끝이야 모든 게 끝장이야, 라고 말이야. 그럴 때는 둘 중 하나야.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뭔가를 실행하든지. 그렇게 하나의 문제를 풀고 그 다음 문제에 맞닥뜨려 풀게 되고, 또 그 다음을 풀게 되고. 그렇게 문제들을 하나씩 풀다 보면 집으로 오게 되는 거야.”

 

덧 2. 영화가 개봉되자 <라이언 일병 구하기>부터 시작해서 <인터스텔라>, <마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맷 데이먼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돈을 쓴 거냐는 농담이 떠돌던데, 영화를 보고나서 남편님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화성 탐사하러 갈 돈으로 지구 환경이나 개선하면 좋겠네."

    내년에도 가뭄이라는데... ㅠ.ㅠ    

 

덧 3. 블루레이와 DVD에서는 편집에서 잘려나간 20분 추가 영상이 들어간다고 한다! 

 

덧 4. 아래의 바이럴 영상들은 단지 영화 홍보차원이라기보다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 같다. 특히 마지막 "Bring Him Home"을 보고 있으면 내가 여전히 마크 위트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듯...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으는 세계, 그곳에 나도 머물고 싶다! ㅠ.ㅠ     

 

    

  

 

 

 

 


 

 Giuseppe Penone, Respirare l’ombra (Respirer l’ombre), 2000
Cages métalliques, feuilles de laurier, bronze
Installation 2001 : 180 cages
4 formats de cage :
117 x 78 x 7 cm ; 100 x 78 x 7 cm ;
78 x 78 x 7 cm ; 50 x 78 x 7 cm

© Adagp, Paris 2007

 

  프랑스 국립 퐁피두 센터 특별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지우제페 페노네의 작품, "그늘을 들이마시다"였다.

 월계수 잎 더미를 직육면체의  철망안에 가득 넣어 전시실 사방에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종의 설치미술작품이었다. 월계수 잎은 이미 그 색이 바랬고 만지면 손 안에서 바스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향은 여전히 강했으며, 사방의 잎벽이 전하는 메세지는 이 땅에서도 유효했다.

 그 방안에서는 그늘을 들이마시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이 아닌 형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주 오래 전,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다'는 형용사로 수식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던 시절에는 옛 사람들은 그늘을 들이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에서 떨어져나온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살았을 것이다. 몸을 한껏 수그려 겸손한 삶의 방식을 따르면서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방의 서늘함이, 폐속까지 부드럽게 스며드는 월계수 잎의 시원한 향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숲의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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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papa



회복 제8원리: 고통을 재활용하라 / 드리라 Yield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약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3-12

 

2,000년 전, 예수님은 갈릴리 언덕에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설교를 하셨다. 설교의 핵심은 오늘날 우리가 팔복이라고 부르는 행복으로 가는 여덟가지 원리이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다.

 

오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이 말씀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회복의 원리로 말이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자신의 영적 가난함을 알고 변화의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회복의 제1원리와 같다.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2원리의 나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나를 회복시킬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3원리인 내 모든 삶과 뜻을 예수님의 보살핌과 다스림에 맡기기로 의...으로 선택하는 것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유함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통제된 힘을 뜻하며 나를 맡기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나의 잘못을 솔직하게 점검하고, 하나님과 나 자신과 신뢰하는 제삼자에게 고백하라4원리와 상관있다.


 다섯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일으키기 원하시는 모든 변화에 기꺼이 순종하고, 내 인격의 결점들을 제거하실 때 겸손히 순종하라라는 5원리와 연결된다.


 여섯째, 팔복 중 인간관계와 관련된 두 말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나의 모든 관계들을 평가해 보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며, 만약 상대방에게 오히려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에게 준 피해를 보상하라6원리와 상통한다.


 그리고 이 모든 원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매일 하나님과의 시간을 확보하여 자기 점검, 성경 읽기,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할 능력을 얻는 것이다.

 

이 모든 원리가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바로 마지막 원리이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Yield

나의 모범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받으라

 

 나는 고통스러웠다. 내가 처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도피로만 여겨질까봐 이제는 쉽게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인내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 무릎이 후들거리며 꺾이곤 했다. 나는 내 고통의 의미를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다. 그 이유라도 알면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고통의 이유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의 이유는, 고집 센 자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는 괴로움 속에서 내 곁에 남은 이는,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음을, 하나님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전부라는 고백을 하게 하며 내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특히 나처럼 자존감은 낮으면서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던 이에게는 직격탄이나 다름없었다.

고통을 경험한 자는 한없이 낮아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낮아짐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며, 진정으로 그들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다른 사람들의 상처 속에서 우리의 상처를 알게 된다.

 

나의 고통이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되었고, 내가 낮아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 고통은 그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고 아직도 고군분투하는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내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문제와 곤란을 나누어 짊어 지려는 제스쳐를 갖게된다면 릭 워렌 목사님의 말씀처럼 나는 내 고통을 훌륭하게 재활용하는 셈이겠지.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곳에 저를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를 하기까지 얼추 삼십년이 걸렸다. 물론 나는 아직도 두렵다. 내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이며 내 신앙은 온전하지 못하기에 일보 진전하다가도 다시 퇴보할지도 모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밤, 하나님께서 얘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난 이 용규 선교사처럼 몽골로 가자꾸나,” 그러시면 에이, 왜 그러세요. 절 잘 아시잖아요.” 라고 너스레를 떨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내게 작고도 큰 선물을 주셨으니, 나를 빚으신 당신이기에 나를 가장 적절히 사용하실 수 있는 방법을 당신이 더 잘 아실 거라는 믿음이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교육이라는 장에서 나를 다시 쓰시려 하실지도 모르며, 어쩌면 얘야, 네 아이를 크게 쓸 터이니 딴 생각 말고 아이를 잘 양육해라, 하실지도 모른다. 아니면 현재 지친 내 상상력으로는 그릴 수도 없는 엉뚱한 그림 속으로 나를 집어넣으실지도 모른다. 또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모습 그대로 살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에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를,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그 어떤 모습의 삶이라도 분명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의 선함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잊지 않고 살리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꼭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

 

나를 도구로 써서 그린 당신의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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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valuate

 

나의 모든 관계들을 평가해 보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피해를 보상하라.

단, 예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이나 제 삼자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이다

.

 

  주기도문은 위험한 기도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것은 “주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것만큼만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원한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당신도 미래에 용서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다시 건널 다리를 태워 없애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한 사람이 존 웨슬리에게 가서 “나는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 웨슬리는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죄를 짓기 말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불태우지 말라. (릭 워렌의 "회복으로 가는 길" p175)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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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제 5 원리 기꺼이 순종하라 Voluntarily Submit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일으키기 원하시는 모든 변화에

기꺼이 순종하고

내 인격의 결점들을 제거하실 때 겸손히 순종하라

 

  어린 시절 나는 유리구슬을 갖고 놀곤 했다. 남자 아이들처럼 구슬치기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그저 구슬을 모으는 재미에 빠져있었던 듯싶다. 요즘에도 아이들이 그런 구슬을 갖고 놀까? 햇빛 속에서 구슬 속을 들여다보면 영롱한 빛들이 모여 띠를 이루고 마치 은하수처럼 흐르는 게 보였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작은 우주였다. 그래서 그 작은 유리구슬들은 어린 소녀의 보석들이 되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상자 안의 구슬들을 동생들이 만질라치면 소리를 버럭 지르곤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구슬들은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 그런 것들....... 구슬 안에 완벽한 우주의 형상이 보인다 싶으면 꼭 한 편에 가슴 아픈 흠집이 나 있곤 했다. 긁힌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매끄러운 구슬은 그저 둔탁한 빛을 낼 뿐이었다. 그래서 상자 안의 내 구슬들은 어딘가 흠집이 나 있고, 빛을 잃었으며, 그 안에는 은하수가 아니라 살코기에 낀 지방 같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깝다, 는 생각은 결국에는 쓸데 없는 소유욕에도 영향을 끼쳐서 그 어느 날 내 관심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마치 이런 유리구슬과 같다. 우리의 존재를 빛내는 것들 사이로 의식하지도 못하거나 적당히 숨기고 살거나 이미 포기해버린 인격적 결점을 지니고 있다. 일에서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공남녀들은 관계를 놓치고 살지도 모른다. 섬세한 당신은 여러모로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뒤끝이 없이 화통한 당신, 당신도 모르게 남들을 아프게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인생이 마냥 쉬운 당신, 남들 눈에는 게을러보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강해 보이는 당신은 겹겹이 두른 성벽 안에서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는 당신이라면 오래 인내하고 수고하여 얻은 작은 결실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좋은 당신은 결정적으로 자신은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결점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4만 6,000개의 유전자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며, 부모의 양육방식에 의해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결점이 주는 보상에 익숙해져 스스로 몸에 새겨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모든 결점은 보상을 준다. 두려움을 보여 위로를 얻으려 하고, 겁이 많기에 안전한 감옥에서의 평안을 누린다. 쉽사리 터뜨리는 다혈질로 주변을 쉽게 통제하려하며, 모난 모습으로 주목을 받으려 한다. 머리만을 앞세워 성공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만 집중하여 언제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뿌듯해한다. 그리고 우린 이렇게 말한다. “이게 나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5장 변화를 받으라/기꺼이 순종해라>에서는 우리들이 이 모든 결점들을 “종종 정체성과 혼동”하며, “달리기에 최고는 아닐지라도, 편하고 익숙한 낡은 신발”처럼 여기며 그 결점이 주는 “나름대로의 보상을 잃기 싫어한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변화를 꿈꾸는 그 순간에 사탄은 “그렇게 해도 아무 소용없어. 넌 할 수 없어. 넌 변화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항상 불어넣는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변화를 꿈꾼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모를 때에도 우리의 가슴을 헛헛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삶속에 지방덩어리처럼 끼어 있음을 인식한다. 변화를 꿈꾸지만 말고, 올바른 방법을 통해 변화를 실현시키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보자. 그저 이게 나야, 라고 자신의 결점을 삶의 일부로, 자기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그것은 지금 당장은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에 큰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꼭 우릴 넘어뜨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이다. 지금 당장의 부족한 모습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모습일지언정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형상에로의 희망과 믿음을 잃지 말자.

 저자는 다음의 7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p144-164)

 첫째, 한 번에 하나의 결점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하라. 그리고 구체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하시게 하라.

 둘째, 한 번에 하나의 승리에 집중하라. 하나님은 당신이 하루 동안 변화될 힘을 주시지, 한 주나 한 달이나 남은 평생이나 영원히 변화될 힘을 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셋째, 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집중하라. 당신의 의지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심이란 배의 모든 계기가 어느 한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나는 배를 그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려는 것이다.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매일 매시간 당신의 결점을 하나님이 직접 모시는 쓰레기차가 수거해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려 보라.

 넷째,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 나쁜 것 말고, 좋은 것에 초점을 맞추라.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있으면 맞서지 말고 원하는 곳으로 채널을 돌려라.

 다섯째, 기분이나 느낌이 아닌 선행에 집중하라. 옳은 일을 하면 그 후에 좋은 느낌이 따라온다. 변화되고 싶은 느낌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결코 변화될 수 없다. 우리는 감정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지만, 근육은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분이 나든 나지 않든, 옳은 것을 하라. 그러면 기분이 따라올 것이다.

 여섯째,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라. 성경은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1-12)”라고 말씀한다. 회복과 변화는 혼자서 이뤄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일곱째, 과정에 집중하라. 하나님께서는 성장하는 중인 당신을 사랑하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변화되려는 당신이 온전히 준비되기 전에 당신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일으키실 변화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저의 인격의 결점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합니다.”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그러니 이 아침, 다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일으키실 변화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저의 인격의 결점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 당신 차례예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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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제 4 원리 Openly examine

 나의 잘못을 솔직하게 점검하고, 하나님과 나 자신과 신뢰하는 제삼자에게 고백하라.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받고 태어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신앙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아침이면 새벽의 미명 속에서 어린 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티 없이 맑은 얼굴이 이런 것이로구나, 아이의 순수함이 이런 것이로구나, 보는 내 마음마저도 투명해진다. 이런 아이조차도 원죄를 받고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이 잘 이해되질 않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는 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성인군자는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라면서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했어야만 했는데...”라는 말로 가득 차 있다고 하질 않는가. 우리 모두 매일 크고 작은 후회를 하며, 자책하며, 때로는 시간을 돌리고만 싶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저자는 불필요한 죄책감은 자신감을 잃게 하며, 관계를 깨드리고, 과거에 얽매이게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얽매인 삶은 백미러를 보며 운전하는 것과 같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께 삶을 맡기기로 결정을 하였으면 다음의 순서로 과거까지 온전히 내려놓기를 권하고 있다.

첫째, 도덕성 점검 목록을 작성할 것. 특히 말로서가 아닌 글로서 구체적으로 과거를 점검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괴롭혔는지, 나의 결점, 죄, 잘못을 적어보아라.

둘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라.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 “나”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을 탓하기에는 마냥 억울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90% 확실한 잘못으로 자신의 책임을 모른 척 하지 말고 자신의 10%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인정하라.

셋째,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 하나님은 즉시, 값없이, 완전히 용서하신다.

넷째, 다른 사람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라. 하나님께서는 “너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있고, 드러냄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으며,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의 용서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잘 알고, 이야기를 듣고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질 않을 성숙한 사람에게 당신의 잘못과 고통을 고백해라.

다섯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자신을 용서하라.

  개인적으로 마지막 단계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내게 어떤 부족함이 있더라도, 외부적으로 남 보기에 좋은 조건이 하나 없더라도, 아니 치명적인 상처가 있더라도,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 언제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써왔던 내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이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만 전념하던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직장을 그만 두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지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음에 풍랑이 일곤 한다. 마치 세상과 내가 분리된 느낌에 엉뚱한 소외감이 내 뒤통수를 치기도 했으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생산적인 삶을 아무런 문제없이 영위해나가는 듯한 생각에 자신을 지혜롭지 못하고 인내심도 부족하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런 못난 인간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직도 난 온전하지 못하다. 신앙적으로도 여물지 못한 인간이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감히 자부할 수도 없을 만큼 초짜 신앙인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회개하고, 결심하고, 감사기도를 올릴지라도 내일 다시 나약한 모습으로 투정부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라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기다려 주시고 보듬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님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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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제 3 원리 Consciously Choose.

내 모든 삶과 뜻을 예수님의 보살핌과 다스림에 맡기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라.

 

  1장에서는 인식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 2장에서는 믿음 (나는 무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으며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3장에서는 드디어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말한다.

  지난 주 2장을 묵상한 뒤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보겠냐는 전화였다. 이런 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일까, 신기하기도 했고 매우 기뻤다. 조건도 매우 좋은 편이어서 그날 저녁에 바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주말 내내 마음이 불안한 게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쩌지, 설사 됐다고 해도 처음 맡는 일인데 잘 할 수 있을까, 바로 짤리기라도 하면 중간에 소개해준 실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다닐까, 여러 불안의 끝에 결국 갖은 핑계를 만들어 대면서 시작조차 말자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열심히 나를 달래주신다.

  “우리는 먼저 결정을 하고, 그 다음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모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결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 먼저 결정을 하라. <제 삶을 예수님의 보살핌과 다스림을 향해 활짝 열겠습니다. 저의 의심, 의문, 두려움, 염려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합니다.>라고 말씀드리라.” (p 84)

  아, 우리는 얼마나 무거운 삶을 살고 있는가. 염려와 의심, 두려움, 불필요한 책임감으로 너무나 삶은 무겁다. 저자는 이렇게 무거운 우리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운행하는지를 다음의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한 애완동물 가게의 트럭이 정지 신호 앞에 서 있었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서 나무 막대기를 들고 트럭 뒷부분을 두들겼다. 그가 도대체 뭘 하는 것인지 궁금했던 한 사람이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거죠?”라고 물었다. 운전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2톤까지만 실을 수 있는 트럭에 4톤의 카나리아를 싣고 다니는 중이라서 2톤은 항상 날게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두들겨대며 삶의 많은 것을 날게 하려고 애쓴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허리가 자꾸 굽어져 신음소리가 절로 삐져나오는데도 짐은 나날이 무거워만 간다. 내가 스스로 짊어지는 짐의 무게에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더하게 되는 역할에 대한 무게들까지. 그래서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삶의 길목에서 나 또한 막대기를 들고 얼마나 분주하게 뛰어 다니는가.

  제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제 삶을 내려놓으니, 당신이 알아서 관리해 주세요. 더 이상 전 제 삶에 대해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보이는 삶의 방식인가.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인가.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 말은 내게는 내 삶의 운전대를 양도하라는 말처럼만 들렸다. 안 그래도 심약하고 순종적인 맏이의 삶이 갑갑하기만 했고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똑똑한 여자들을 멘토로 삼고 싶었기에, 난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로부터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던 나는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관리하는 일에 희열을 느꼈고 그제서야 성인이 된 듯 뿌듯했었다. 하지만, 그 희열과 뿌듯함은 일종의 덫이었다. 내 부모와 어린 시절의 내가 이미 형성해버린 “뭘 해도 부족한 나”의 그늘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새 내 안의 목소리로 단단히 자리잡고서 항상 더 소유하기를, 더 나은 누군가가 되기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다. 내 삶의 운전대를 분명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삶이 뜻하는 데로 가지 않아 언제나 불만스러웠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것일까, 라는 끝없는 의구심.

   삶의 방향을 잃고, 기를 쓰고 노력해도 내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길어지면서 어머니가 강조하셨던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 삶의 주체가 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내 삶은 진정 나의 것이 맞는가.

  내 삶이 좀 더 궁극적인 어떤 의미를 이루기 위한 신의 도구라면 내 삶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운전대를 양보하자고 결정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는 순간, 한없이 초라하게 여겨졌던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일까, 하는 기대감도 생겼다. 비록 나의 오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바로 지금은 알 수 없을지언정 언젠가는 분명히 알게 될 커다란 퍼즐그림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한 조각일 것이다. 소망컨대 나라는 그림이 그의 눈에 아름답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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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불안정할수록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혹은 상황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당신은

자신의 본 모습에 대한 두려움,
문제가 두더지처럼 끝없이 튀어 올라오는 데서 연유하는 좌절감,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고통을 잊기 위해 그저 몸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삶의 피로,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인 실패를

바로 지금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겸손해지자.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정직해지자.
잘못을 저지르는 성향을 극복할 힘이 당신에게 없으며
당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따라서 자유로 가는 첫 걸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


<<The Road to Recovery 제1장을 묵상하며...>>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57: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