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을 아시는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다. 강우량 측정이 가능해진 이래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는 절대사막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 사막에는 2,000~3,000살로 추정되는 야레타가 있다. 얼핏 푸른 이끼 덩어리처럼 보이나 거대한 관목이다. 가지가 철수세미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그 위에 발 딛고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이며, 가지 끄트머리마다 푸른 잎들이 극도로 조밀하게 붙어 있다. 이것이 바위마저 깨트린다는 강풍과 극강의 추위를 견뎌내는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황무지 여기저기 무덤처럼 봉긋 솟아 있거나, 비정상적으로 몸을 부풀린 악성 종양처럼 돋아 있거나, 암석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듯이 번식한 사진들을 보면 외계 행성 어딘가에 불시착한 느낌마저 준다. 


이 기괴한 생김새의 미나리과 식물은 지구상에서 손 꼽히는 장수식물로서 일년에 1cm씩 자란다고 한다. 


불모지 같은 땅에서, 

여전히 살아 있고 아직도 크고 있다.


일년에 1cm.  





오후 6시 14분. 나는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경비실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다 말다 했고 차가 오고 갔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걸어갔다. 도복을 입은 꼬마아이가 형을 좇아 내달렸다. 어느 집에선가 개가 컹, 하고 짖었고 길냥이가 사뿐사뿐 놀이터를 가로질렀다. 바로 그 때 놀이터 화단에 심겨진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나무를 바라봤다. 멋진 나무였다. 멋진 10분이었다. 




"기억 속의 고통은 서정적인 향수를 자아낸다." - 폴 서루, <여행자의 책>


고통마저도 '서정적 향수'로 기억시키는 시간의 힘은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은가. 기억은 그럴 듯하게 포장되었다. 고통은 이미 기울었다. 기억 속에서 삭은 고통을 조심스럽게 밟고 서성이다 바깥으로 나온다. 이제 나는 구경꾼으로 그곳에 서 있다. 

기울고, 자울어지는 것들을 보면 왜 이렇게 애달픈지 모르겠다. 심지어 폐허로 남은 기억조차 말이다.   



중학교 때 한 친구는 삼위일체설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아서 나를 따라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올해 5학년인 딸아이는 신을 지나치게 인격화시킨 나머지 신의 성정체성과 인종정체성을 헷갈려하면서 신성과 인성의 개념을 마구 뒤섞고 있다. 언젠가 아이가 그려낸 신이 (심지어 그리스신 제우스도 아닌)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느낌이라 무슨 하나님이 이렇냐며 큭큭거렸는데 아이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해서 그 뒤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호흡한 나머지 내 신앙이 내 정체성의 기반인 것은 맞으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에 비하면 그 신앙은 여물지 못했다. 내 믿음은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는 하나 손에 잡히지는 않는 연무처럼 가끔 피어오르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그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타고난 기질상 논리적이지 못하고 직관적이며,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각 잡힌 세상보다는 우연과 필연이 성기게 짜여 틈새 많은 세상을 깊이 아낀다. 그러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속 깊이 결론은 내려졌던 것이다. 그건 애초부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하는 내 빈약한 언어로는 신을 말할 수 없다, 라고.

 

그렇다 해도 신과 종교에 대해 묻는 딸아이의 요구를 맞닥뜨리면 나 또한 이해가능한 언어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에게

 

라틴 신학의 아버지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으면 안다"라고 표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이다"라고 가르쳤으며, 또 안셀무스는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라고 (p60)

 

말하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내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이것이 내가 받은 대답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실망하고 회의했기 때문이다.

 

2014416일 이후 나는 깊이 의심했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거의) 전 국민이 기적을 바라며 사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 가망 없는 나라를 떠나고 싶었고 기적을 호소하느라 몸과 정신과 삶이 피폐해졌을 부모들을 떠올리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는, 나 같은 쭉정이 신자가 아니라 신실한 기도로 아이를 키웠을 부모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다고 울부짖진 않을까. 아니면 그 참혹한 시절도 기도의 힘으로 통과해냈을까.

 

구약성경의 '욥기'는 욥이라는 한 정의롭고 신실한 인간에게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비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모든 비극을 맞닥뜨린 인간. 재산과 명예와 가족과 건강과 친구들을 순차적으로 잃고 결국 신에게도 버림받았다고, 이것은 신이 주는 벌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절망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약한 나는 욥기를 읽지 못한다. 읽고 싶지 않다.

 

 


얼마 전에 영화 <곡성>을 보았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탄식이 나왔다. 누가 선인지 악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도 악이 더 강해서도 아니라 인간이 그저 나약해서였다. 속수무책이었다.

 

 


영화 <곡성>에서 종구(곽도원)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괜찮아, 우리 효진이. 다 꿈이야. 아버지가 다 해결할게." 꿈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엔딩컷을 보고 일어서는데 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아무리 그 이유를 물어도 그 답을 들을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죽음은 무명이 매섭게 짚어준 종구의 죄처럼 그 원인이 보이며 어떤 죽음은 일광이 심드렁하게 말했듯이 그저 운나쁘게 벌어진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시기와 방식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맞게 될 필연적 소멸. 어느 누구도 그 소멸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시기와 방식만 바뀔 뿐이다. 그걸 굉장히 무참한 방식으로 두시간 삼십분 동안 목도한 것 같다.

 

영화의 후유증은 꽤 컸다. 영화가 주는 쟝르적 쾌락은 컸으나 영화가 담고 있는 메세지를 아무리 궁굴려봐도 허탈함과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건 어린 시절, 욥기를 처음 읽고 난 뒤의 마음과 비슷했달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현혹당하여 의심하고 분노하다 불신하고 절망하는 것밖에는 없는가. 의심과 현혹과 불신이 죄의 미끼이며 그 결과가 참변밖에는 없다면 (영화에서는 왜 하필 내 딸이냐고 절규하는 종구에게 무명은 네 딸의 아비가 의심하는 죄를 저질러서라고 답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예정되었다. 의심과 현혹과 불신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얼마나 많을까. 그 믿음이 신실하고, 타고난 기질이 강건하다 해도 곧 현실로 닥칠 자식, 아니 온가족이 맞게 될 참혹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 있었다. 그게 욥이었다. 그리고 욥은 믿음의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 허나 어린 마음에 나는 선한 인간을 악이 시험하도록 놔둔 신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욥과 같지 못한 나는 악의 손에 놀아나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울부짖으며 결국 신을 의심하고 책망할 것이며 그 죄로서 버려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뒤 의도적으로 욥기를 피했다. 회의하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꼈던 어린애였다. 의심을 하다 보면 "내가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묻다가 필연적으로 신의 실재를 묻게 될까 봐 그렇게 불신자가 될까 봐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그건 내가 딛고 선 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르지 않았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 8점
김용규 지음/휴머니스트

 

곡성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장에서 그 책부터 찾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나는 많은 질문에 시달렸고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그때 발견한 책이 하나 있었다. <곡성>이 다시 촉발시킨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그리고 누군가의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가 맞닥뜨릴 실존적 질문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김용규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은 타계하기 전 가톨릭 교회의 신부에게 24개의 질문을 써서 보낸다. 이 질문지는 한때 신부들 사이에서 돌았고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질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내놓은 실존적 물음들이다. '''존재의 근원', '종교', '영혼', '사후 세계' '선과 악' '종교와 과학' '종말' 등에 대해 이른바 '백만장자'는 날카롭게 묻고 있다. 그리고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이용규가 '종교적 관점과 언어'가 아닌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답한다.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롭다. 하지만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하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뒤를 이은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토마스모어, 기욤 부데 같은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작업을 담아낼 고유의 글쓰기 방법을 개발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 내려온 인문주의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적 양식이 있다.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을 끌어다 활용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회장의 질문들에 대해, 되도록 이 방법을 따라 답하고자 한다. (p13)

 

종교의 교리를 따져 묻던 그 옛날의 친구처럼 이제 본격적으로 신에 대해 묻기 시작한 아이처럼 누군가가 내게 다시 묻는다면 신앙이 여물지 못한 나는 인간의 언어로 답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믿으라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신의 언어가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제껏 내가 발견한 인간의 언어 가운데 최선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악을 처단하고 살아남은 주인공 뒤로 흐릿하게 드리워진 불길한 기운처럼 불안과 두려움이, 근심과 걱정이 내 머리맡을 찾아온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선악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이라면,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심한 사람의 신발 밑창에 언제 깔려 죽을지 모르는 개미와 다를 바 없다면, 우리의 매일의 안녕을 위한 기도가, 정의와 선에 대한 갈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도, 어쩔 도리 없이 기도하게 된다. 한밤중에 깊이 잠든 아이의 작은 머리와 여린 어깨와 마른 등줄기와 햇빛에 여문 손을 쓰다듬고 있으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너무도 약한 존재처럼 여겨져서 기도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드러냅니다.

 

 

 

 

 

 

    

    끝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그 속에 그려진 세계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거다. 잠시만, 조금만 더 머물고 싶은 이야기. 심지어 주인공에게 고난이 첩첩산중으로 이어져서 지켜 보는 내내 옷자락 끝을 둘둘 말며 마음을 조아리더라도. 그 결말은 '주인공의 탈출'인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다. 

 

     메인 테마곡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이며 (해리 포터), 절반이 남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인셉션), 러닝타임이 길어 감사하고 (인터스텔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이 혼미해질만큼 휘몰아치며 (매드 맥스), 끝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영화들. 관객을 그 지경으로 몰고가는 데는 연출이나 배우의 힘이 결정적이겠지만, 재미있는 스토리가 지닌 원초적인 힘이야말로 절대적이다. (매드 맥스는 연출의 힘이 90%라고 생각합니다만 ㅠ.ㅠ 존경해요, 감독님... 남은 10%은 샤를리즈 테론의 힘. 언니, 사랑해욧.)

 

    각설하고, 주말에 본 <마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몇 주 전부터 책을 먼저 읽을까, 영화를 먼저 볼까 망설이던 참이었다. 요즘 너무 지르고 다닌 탓에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려 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들어오자마자 예약자 7명이 줄을 섰다. 옆 동네 도서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인스타의 #북스타그램을 검색해보면 <마션> 사진이 주루루 뜬다.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재미있다!" 이러면 기대감이 고조될 수밖에.

 

    영화 <마션>은, 좋았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중에 한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단지 끝나는 게 아쉬울 만큼 이야기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몇몇 장면들이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만치 아름다웠고, 명대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가령,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죽었다고 부모에게 전해달라는 주인공의 말은 지금 생각해 보면 손가락이 오글거리며 낯뜨거워지는 것인데도 듣는 그 순간에는 울컥했다.) 게다가 맷 데이먼이 연기한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는 내 이상형이었다. 이상적 남자가 아니라 이상적 인간.

 

    요즘 나는 '감정을 통제하고 자신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쩍 드리곤 한다. 그때마다 부여잡는 말씀은,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신4:9),"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내 일생 일대의 과제처럼 느껴진달까. 하지만 어떻게? 가령,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황무지에 나 홀로 내팽개쳐져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고 죽음이 목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 내가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크 와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 채 선포한다. 

    "난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우주에선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시작하는거지."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규율을 준수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제어하고 유지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규율을 세우고 할 일을 세분화하여 당장 시작하기,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지키기. 그것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둥지를 짓고 알을 품을 수 있도록 나를 도울  것이다. 물론 그런 핼시온 데이즈 halcyon days야말로 간절한 마음에 대한 신의 응답이며 선물일 거라 믿는다.   

 

    쓰다보니 유쾌하기 짝이 없는 오락 영화를 점잖은 휴먼 드라마로 각색해버린 것 같다. (맷 데이먼이 다소 정상적인 캐릭터로 연기한 것과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사차원 괴짜 캐릭터가 시덥잖은 유머를 시종일관 터뜨린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기대치 않게도 마음이 훈훈해진 게 사실이다. 심지어 울며 겨자먹기로 영화관에 끌려갔던 J는 이렇게 고백했다.

   "엄마, 아빠가 보자고 했던 영화들이 처음에는 거의 다 보기 싫었거든. 근데 보고 나선 다 좋았어."

 

   남편과 내가 의기양양해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핫.   

 

 

 

덧 1. 마크 와트니의 또 다른 명대사. 

 

 “삶의 어느 지점에서 정말 모든 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을 칠 때가 있지. 그래. 이게 끝이야 모든 게 끝장이야, 라고 말이야. 그럴 때는 둘 중 하나야.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뭔가를 실행하든지. 그렇게 하나의 문제를 풀고 그 다음 문제에 맞닥뜨려 풀게 되고, 또 그 다음을 풀게 되고. 그렇게 문제들을 하나씩 풀다 보면 집으로 오게 되는 거야.”

 

덧 2. 영화가 개봉되자 <라이언 일병 구하기>부터 시작해서 <인터스텔라>, <마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맷 데이먼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돈을 쓴 거냐는 농담이 떠돌던데, 영화를 보고나서 남편님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화성 탐사하러 갈 돈으로 지구 환경이나 개선하면 좋겠네."

    내년에도 가뭄이라는데... ㅠ.ㅠ    

 

덧 3. 블루레이와 DVD에서는 편집에서 잘려나간 20분 추가 영상이 들어간다고 한다! 

 

덧 4. 아래의 바이럴 영상들은 단지 영화 홍보차원이라기보다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 같다. 특히 마지막 "Bring Him Home"을 보고 있으면 내가 여전히 마크 위트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듯...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으는 세계, 그곳에 나도 머물고 싶다! ㅠ.ㅠ     

 

    

  

 

 

 

 


 

 

 

    요즘에는 꽃보다 나무를 그리고 있다. 바오밥나무, 야자수, 이팝나무, 후박나무 등  다양한 나무를 그려본다. 김충원의 드로잉 책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나무 사진집을 참조하고 있다.

 

 

    나뭇잎을 채워놓다 보면 오래 전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엄마가 라면봉지를 접고 접어 방석을 만들고, 연애를 실패한 친구가 시뻘개진 눈으로 대바늘을 놀려대고, 부모가 크게 싸울 적마다 그 아이가 서랍 속을 모두 꺼내 다시 개놓곤 했던 그 마음 말이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행위가 머릿속을 비워내고 마음을 다스려줄줄, 그땐 몰랐다.  

 

 

 

 

 

 

 

 

 

 

 

 

 

 

 

 Giuseppe Penone, Respirare l’ombra (Respirer l’ombre), 2000
Cages métalliques, feuilles de laurier, bronze
Installation 2001 : 180 cages
4 formats de cage :
117 x 78 x 7 cm ; 100 x 78 x 7 cm ;
78 x 78 x 7 cm ; 50 x 78 x 7 cm

© Adagp, Paris 2007

 

  프랑스 국립 퐁피두 센터 특별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지우제페 페노네의 작품, "그늘을 들이마시다"였다.

 월계수 잎 더미를 직육면체의  철망안에 가득 넣어 전시실 사방에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종의 설치미술작품이었다. 월계수 잎은 이미 그 색이 바랬고 만지면 손 안에서 바스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향은 여전히 강했으며, 사방의 잎벽이 전하는 메세지는 이 땅에서도 유효했다.

 그 방안에서는 그늘을 들이마시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이 아닌 형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주 오래 전,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다'는 형용사로 수식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던 시절에는 옛 사람들은 그늘을 들이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에서 떨어져나온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살았을 것이다. 몸을 한껏 수그려 겸손한 삶의 방식을 따르면서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방의 서늘함이, 폐속까지 부드럽게 스며드는 월계수 잎의 시원한 향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숲의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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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의 전통민가를 찾아보면 대문이 없다. 대신 정낭이 있다. 길에서 마당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진입로인 ‘올레’와 맞닿은 곳에 대문 대신 통나무가 걸쳐져 있는 돌기둥이 양쪽에 있다. 정주목이라 불리는 이 돌기둥에 구멍 세 개가 뚫려 있고, 이 구멍에 끼워놓는 통나무를 일컬어 정낭이라고 한다. 

  제주도에 대문이 없는 이유는 호랑이 같은 맹수가 없어서라는데, 소와 말을 방목하는 지역 특성상 가축이 집 마당으로 들어와 텃밭에서 키우는 농작물이나 마당에서 말리는 곡식 따위를 먹어치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막기 위한 정낭이 필요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뭍(육지)으로 나와 보니 역시 타지와 제주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제주의 풍광이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중에서 바람이 으뜸이요 그 다음은 돌이었다. 흔하고 흔해 아무데나 널려있는 현무암. 구멍이 송송 뚫린 그 검은 돌. 넘쳐나는 게 돌이라 제주도의 담벽은 돌로 쌓아 올린 것이고 심지어는 밭이나 무덤가도 네모 반듯하게 돌담으로 둘렀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정낭이었다. 정낭이 정주목에 걸쳐진 개수가 뜻하는 바를 어렸을 적 귀동냥으로 들었는데 잊고 있었다. 다시 찾아 보니 그 뜻은 이러했다. 통나무가 하나만 걸쳐져 있으면 집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이고, 두 개 걸쳐져 있으면 좀 더 긴 시간을 외출했다는 뜻이며, 세 개 모두 걸쳐져 있으면 온종일 출타중이라는 신호란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날 오후, 우리는 숲 속 어느 오솔길 앞에서 정낭이 두 개 걸쳐진 것을 보았다. 

                                           "시간이 좀 걸리쿠다. 나중에 보게 마씸."

                                  (잠시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이제는 주인이 없는 빈 집에 정낭만 남아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 찍사: 제이파
* 위 글은 "제주도 여행 싸게 가기"라는 카페의 글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제주도의 모든 틈새에는 바람이 고여 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어디서나
바람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그리고 들을 수 있다.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귓볼을 타고 기어 들어가 달팽이관까지 웅,웅, 울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찍사: 제이파 

여느 때와 같이 바람이 불던 날,
제주도의 돌 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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