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모든 매혹은 똑같은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내면의 빈 곳에서 오거든요.”

그는 검지로 가슴을 쿵쿵 쳤다.

“뭐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채워야 하거든요. 책·그림·사람, 다 똑같단 말입니다….”

                        - 당 신 을 믿 고 추 락 하 던 밤(The Blindfold by Siri Hustvedt)


0. 매혹적인 이야기.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1. 첫문장에 붙들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완독한 게 얼마만인지. 격렬함 뒤 찾아오는 나른함이랄까. 책을 덮고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2. 각각의 단편 속에서 감수성 예민한 문학전공 대학원생 아이리스는 사랑과 예술, 이상적 자아와 낯선 자아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개성 강한 인물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인물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 흥미로운 점은 한 인물의 기행에 가까운 행태가 다른 이야기 속의 아이리스에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죽은 여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모닝 씨라든가 자아가 분열된 O, 기괴한 연출에 열중하는 조지의 모습은 아이리스가 스스로 발굴해내는 내면의 모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연작소설집이지만 마지막 수록작은 앞선 세 작품을 시간적으로 품고 있다. 불현듯 끝나버리는 엔딩이 앞선 세 단편에서는 매력적이었으나 마지막 단편에서는 다소간 허탈. 아이리스의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 듯하지만, 다른 결말들에서처럼 깊은 여운을 맛보진 못했다. 어쩌면 읽느라 지쳤는지도. 하지만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은 대부분 마지막 단편에 모여 있었다. 

3. 마지막 단편에서 아이리스가 그림을 묘사하는 대목. 첫번째 단편에서 모닝이 죽은 여인이 남긴 소지품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 기억을 기억하는, 사후의 삶.

"현실의 빛이 아니라 내면의 빛이랄까, 강력한 기억의 빛이에요.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지난 일처럼, 이미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마 그래서 나중에 그렇게 강렬한 효과를 낳나 봐요. 내 말은 그 사물 자체가 기억이고 사후의 삶이고, 그래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거라는..."


4. 소설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한 대목.  

"그 여섯 블록은 오디세이가 무색했다. 시각과 함께 평형감각이 사라졌고 나는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머릿속으로 한 블록 한 블록을 헤아려 전진했다. 마이클이 인도하려고 팔을 뻗었지만 난 그를 밀어내며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5. 때로는 한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둬야할 말도 있다. 

"말이 시간을 두고 가라앉아야 할 때가 자주 있죠. 있잖아요, 한동안 땅 속에 묻어두는 거."







0. <꿈의 해석을 읽다>를 드디어 완독. 대표적인 중화권 인문학자라는 '양자오'가 지었고, '유유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어쩌다 보니 올 들어 유유출판사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됐는데, 작가들이 하나같이 목소리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들려준다. 프로이트를 해설한 이 책 또한 무겁지 않다. 부제가 '프로이트를 읽기 위한 첫걸음'인데, 그 첫걸음으로 완벽하다! 쉽고 재미있다. <꿈의 해석>보다 더 재미있을까 봐 염려될 만큼 재미있다;;

작가는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그 인물이 놓인 '19세기 유럽'이라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배경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적 배경지식이 확장되며 당대를 풍미한 예술사조와 철학까지 훑게 되니, 이 자체만으로 풍성한 독서체험이라 할 만하다.

책은 들고 다니기에 딱 좋은 사이즈이며, 뒷날개를 접어 책갈피로 이용하게 만든 센스 또한 마음에 든다.

자자, 입문서도 읽었으니, 이제 십수년 간 책장에 꽂아만 뒀던 문제의 <꿈의 해석>을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설마 버리진 않았겠지?!

 

1. 오늘 내가 낚인 기사는, 한 유명 배우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사칭하고 자신에게 성적 모멸감을 준 네티즌을 고소한 기사였다. 정신병자, 관심종자, 스토커라고 질타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그의 지인이 남긴 듯한 댓글을 주목했다. 그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짓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의 블로그와 인스타까지 찾아봤다. 그는 자신을 킹메이커라고 믿고 있었고, 종국에는 대권을 잡으려는 야심찬 꿈을 꾸고 있었다.

 

2. 이상과 망상, 정상과 비정상,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요즘처럼 온갖 음모론과 피해망상이 널려 있는 시대에서는 이 경계가 매우 흐릿한 것 같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심리 기제의 운용이 다소 극단적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쪽에는 정상인이 있고 저쪽에 정신병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한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 이후의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내재된 정신질환을 자각했다.... 20세기 예술은 기본적으로 광기의 예술이자 정신분열적 예술이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을 의자에 눕히고 끊임없이 기억을 되돌려 자기 자신의 비참함과 내면의 어둠을 깨닫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의 괴물을 새기거나 그리거나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제거하고자 노력했고, 이로 인해 20세기 현대 예술이 출현했다. (p188-189)"


3. 어제 한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했다.

"그 책에 고등학생의 존속살해 사건이 나오거든. 실화야. 충격적인 뉴스여서 우리도 언젠가 듣긴 들었을 거야. 기억 안 나? 뭐 우리랑 상관 없는 이야기겠거니 싶어 아마 쉽게 잊었겠지. 일제고사 전국등수가 서울대에 들어갈 만큼 좋았던 얘였는데, 성적이 떨어져서 엄마한테 체벌을 받은 거야. 처음에는 회초리, 나중에는 골프채, 야구방망이, 뭐 이런 식으로 강도가 높아지다가 애를 며칠 씩 가두고 밥도 굶겼다네. 정신 좀 차리라는 뜻으로. 그러던 어느 날 이 애가 충동적으로 엄마를 살해한 거지. 사흘간 잠도 못 자고 굶고 매타작을 당했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애는 이해하지 못해. 일시적인 정신착란, 뭐 그렇게 된 거지." 엄마를 흥분시킨 그 첫번째 일제고사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 이 아이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아이는 평..했다고 했다.

 

4. 그 엄마도 평..한 여자였다고 주위 사람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5. 언젠가 고교시절 베프가 호들갑을 떨며 한 동창에 대해 말해줬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였다.

"같은반이 아니어도 알 만한데. , 서울대 갔잖아, 진짜 기억 안 나? 그냥, 평범해. 공부만 하던 얘였는데... 그게, 그만 실연하고 정신줄을 놨댄다. 무슨 상처를 어떻게 받았는지... 학교 그만두고 집에 와 있대. 연애를 얼마나 지독하게 한 건지. 그럴 얘가 아닌데."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인간은 모두 잠재적인 정신병 환자다. (p186)

무척 연약한 존재인 인간은 강한 억압을 필요로 하는 경험과 맞닥뜨리면 아주 쉽게 정신병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미치는 것은 실연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실연의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미칠 위험에서는 도리어 멀어질 수 있다.(p168-169)

 

6. 오래 전, 고등학생 때. 현관문 앞.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 사춘기였으니 모든 게 다 짜증스러웠겠지.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꽤 억눌려 있었다. 멱살 잡힌 채 끌려가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얘 왜 이러니,' 그런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감정을 폭발하는 순간에도 엄마의 표정을 예민하게 살폈고 이성이 멀쩡하게 작동하는 걸 의식하곤 내심 한탄했다. 왜 나란 인간은 이런 순간에 정신줄을 놓지 못하지. 확 놔버리면 좋을 텐데. 아주 시원스럽게 내질러버린다면, 엄마가 황당하게만 나를 쳐다보고 있진 않을 텐데. 내 감정을 좀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텐데. 엄마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집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다.

 

7.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프로이트의 입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 정신줄을 놓을 만큼 억압받진 않았던 거다. 고작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릴, 딱 그 정도 폭발할 만큼의 억압이었던 거다. 그저 전형적인 사춘기를 앓았을 뿐. 어쩌면 그 정도의 미약한 분출이라도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릎끓고 앉아 성경을 펼쳤는지도...

 

8. 틈틈이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들을 맞닥뜨리곤 한다. 길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뉴스와 풍문을 통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 나는 그게 언제나 궁금했지만 결코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저 너머의 일이니까. 비정상과 비현실의 세계에 내가 거주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그 세계가 만인에게 열려 있다고,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여기 도처에 입을 벌리고 있다고 느낀다. 수면 위로 3년만에 끌어올려진 세월호가, 그 처참하게 상처입고 돌이킬 수 없이 부식된 모습이, 이 세계와 우리 내면에 도사린 어둠의 은유 같다. 우리가 결국 '실패'했다면, 계속 '억압'당했다면, 끔찍하게 변형되고 뒤틀린 채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겠지. 1073일만에 심연 속에서 건져낸 건, 어쩌면 우리의 인간성인지도 모르겠다





지난여름 나는 계속 아팠습니다. 그 아픔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져 붉은 피가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숫자와 그래프로 증명되는 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호소할 수 없는 고통만큼 괴로운 것은 그것이 나를 고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의 첫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고 언젠가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때마침 자리를 비운 제3자에 대해 말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는데,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내가 바로 그 작은집의 맏이인데, 내가 모르는 다른 작은집 아이들이 있는 건가. '너희들'이라는 2인칭을 '작은집 아이들'이라고 3인칭화시켜서 표현한 것이 듣는 이의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배려인 건지 순화시켜 표현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청자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거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청자를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냥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바꿨다. 그때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게 억울했을까. 그 말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끝 쩌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의 맥락상 그 '약하다'는 형용사는 신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인 특성을 꼬집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약하다' 또는 '유약하다'이겠지.

 

  내가 봐도 큰집 아이들은 독한 데가 있었다. 큰애는 일찌감치 사시에 통과해서 두 아이를 시댁에 맡겨두고 지방법원을 돌고 있었고, 둘째는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넷이나 키우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뒤늦게 원하는 방식대로 살겠다고 철밥통 걷어차고 집에 주저앉은 꼴이었고, 남동생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모처럼 두 사촌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왁거렸지만, 그때만 해도 그 대화의 결론이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는 게 될지 정녕 몰랐기에 "대단하네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 정녕 속없다. 역시 추석은 관계를 해치고 정신건강에 해롭다.

 

  하지만 그 말에 자존심을 다쳤던 이유는 그게 내 급소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촌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워낙 출중했다. 하지만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본 적은 없었다. 그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도 한 몫 했고, 결정적으로 워낙 기질이 달랐다. 말과 해마를 비교할 수 있나? 우리들의 부모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집'의 우리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그러니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큰어머니와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날아온 화살에 거의 절명할 뻔했다. 상처로 남은 건 그걸 상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나 또한 큰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난생 처음 맛보는 열패감과 무력감으로 어쩔줄 몰랐다. 내 선택에 대한 의심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가족 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때조차 내 자신이 징징거리는 것 같아 그 또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내가 남동생의 공황장애를 그저 연민으로만 껴안을리 만무했다. 남동생의 힘들고 괴롭다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한 신세한탄처럼도 들렸다. 내 자신과 남동생에 대한 그런 감정들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내가 감추려던 게 들통난 셈이었다. 그때 친정엄마가 옆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큰어머니의 말은 앞으로도 그냥 내 가슴에, 그리고 이 공개적 일기장에 묻어두는 걸로.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제목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제목이다. 참 잘 지었다. 당신이라는 안정제...라니 시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나는 '힐링', '괜찮아' 류의 책들이 지겨웠다. '괜찮지 않다' '아프다' 그러니 그냥 '미워해도 돼' '원하는 대로 살아' 류의 책들도 지겨웠다. 그런 책들이 감성적으로 포장하고 심리학적으로 무장한 조언들이 허무하게 보였다. 책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이미 '괜찮은' 거다. 너무 아프고 아주 괜찮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은 소용없다. 그들에게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고, 이 책 또한 그저 값싼 위로의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애당초 생각했던 것처럼 이 책은 감성에세이가 아니었다. 우울증을 앓는 이와 그를 오래 상담한 정신과의 사이에 이뤄진 일종의 대화였다. 나는 작가 김동영의 용기에 놀랐고,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 한 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지금, 두 작가 모두에게 감탄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니까 내담자만이 아니라 상담자 또한 솔직하게 자신을, 자신의 상처와 괴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까발린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김동영 작가의 경우에는. 이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병에 지지 않을 것이다. 아픈 자신을 대면할 용기가, 그걸 다른 이들과 공유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상담의 또한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환자들의 '눈물 앞에 앉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걸 힘들어하는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한 채 '다시, 눈물 앞에 앉'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전하는 조언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아픈 사람은 정작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어쩌면 덜 아파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혼자만 아픈 건 아니라는 것을요. 모두가 같은 감정과 고통을 느끼며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그 말에는 좀더 밝고 건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다시 일상으로 그리고 나의 도시 서울로 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갇혀버린 저를 미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 옆에는 이런 날 그냥 지켜봐주고 마음 써주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으니깐요. 설사 그들이 제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겁니다.

 

건강하십시오.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세요. 힘들면 당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분명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겁니다. 만약 없다 하면 시들어빠진 꽃이라도 있겠죠. 그걸 통해 위안을 받으십시오. (p259)

                       

                                                                                                    - 김동영


창문도 없는 작디작은 이 진료실에서 팔 년을 일했다. 그동안 나는 달라졌다. 내가 그걸 느낀다. 감정이 새어나가는 느낌. 어느새 눈물도 말랐다. 어떻게든 내 진심을 전달하고 싶은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우울해서 무거운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아 무겁기만 하다. 마음이 멈춰서버렸다.

 

... 그냥 서글펐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더이상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슬펐던 거겠지. 변해버린 나란 사람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다시 출근. 비밀번호를 누르고, 연구실 문을 연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메일을 확인하고, 책을 잠깐 읽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아홉시다. 가운을 걸치고, 진료실로 내려간다.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다시, 눈물 앞에 앉았다. 이전처럼 나는 그들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 (p249)


                                                                                                       - 김병수




  '내 인생의 책'이라는 수사는 부담스럽지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내게는 그렇게 부를만한 책이다. 그 때문에 며칠 전 도서관에서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란 책이 반납함에 놓여있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페터 비에리의 필명이다. 나는 그가 소설 쓰는 언어철학자임을 진작 알았지만 그가 '내 인생의 책'의 저자임에도 그의 철학서(?)들은 찾아본 적이 없다. <자유의 기술>.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만 봐도 딱히 흥미가 일지 않았다.

  

  일단 그 책을 집어든 건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 때문이었지만, 내가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독일어 원제는 해석 불가. 영어 제목은 <Human Living: A Way of Dignity>. <삶의 격>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요즘 '존엄dignity'라는 말에 꽂혀 있다.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면 장소를 불문하고 울컥하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다. , 나이 탓인가. 훌쩍. 어쩌면 현실세계에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인지도. 그도 아니면 나 또한 강팍하게 살아가느라 '존엄성'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심리적으로 몰리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안정제'가 필요하다. 친정엄마에게는 "니 모습 그대로 족하다"고 말해주는 하나님이 '당신의 안정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이거나 친구일지 모른다. 내게는 대체로 책이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치료가 절실한 경우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이 경쟁사회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벼랑으로 모는 것 같다. 존엄성을 위협하는 사회, 직장, 학교, 가정, 관계들. 하지만 상담이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정신과의나 전문상담가를 만나는 일에 쉬이 발걸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삶의 격>에서 이런 일화가 소개된다. 작가 페터 비에리는 언젠가 약국에 갔다가 이웃이 정신병 치료 약품을 받아 가는 걸 보게 된다. 이웃이 창피한 듯 눈을 내리깔자 그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다. "저도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간이 안 좋다 뭐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머리니 신경이니 뭐니, 이러다가 당최 뭐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결국 커피를 마시러 간다. 그걸 계기로 종종 그들은 같이 커피를 마신다. 그는 이 일화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의 존엄성은, 내면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모래성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심으로부터 인간 사이의 연대감이라는 값진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p99)

 

작가는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치료를 받으러 가는 행위는 존엄성의 표출이며 상처 입은 허영심을 존엄성의 훼손이라고 오해하는 거짓 자존심을 거부한다는 단호한 표현이다.

 

  어쩌면 전문가들을 향한 '첫 발'을 떼기 어려운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안정제>'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공감받지 못해 고독한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유약하다'는 타인의 판단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두 저자는 따뜻한 ''을 내어줄 것이다내게 그러했듯 말이다.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들을 책장에 꽂다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려놓고 잊어버린 책을 발견했다. 안도현 에세이집 <그런 일>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배경의 힘으로 해오라기는 날아간다는 구절을 읽었다. 시인의 언어. 창밖을 바라봤다. 뒤로 물러설수록 희미해지는 능선들을 눈으로 좇았다. 녹음은 짙어지고 있을 테지만 가까이 가보지 않은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대기는 꽤 오랫동안 부옇다. 새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배경의 힘으로날아간다.’ 그렇게 격렬하게 부각되는 새들을 보고 싶다. 그런 새들은 여행자의 태도를 지녔을 것 같다. 시인의 말을 시각적으로 느끼고 싶지만, 저 창 너머로는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일 - 8점
안도현 지음/삼인


이편 하늘로는 철새 대신 군 헬리콥터들이 거친 굉음을 내며 지나치곤 한다. 며칠 전에도 세 대의 헬리콥터들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아이가 얼른 와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는 베란다에 서서 육중한 철갑 뭉치들이 세 개의 점으로 작아졌다가 이윽고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와 인근 도서관에서는 철새들을 해마다 볼 수 있다. 바람의 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곳을 비껴가는.


황량한 계절,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요란하게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얼른 창밖을 내다본다. 철새들은 V자 대형을 맞춰 날아온다. 불현듯 열이 흐트러지면서 선두가 바뀐다. 고도를 낮춘 채 비스듬히 선회하다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북쪽으로 날아간다.

연구에 따르면 철새들은 앞선 새의 날갯짓으로 생긴 상승기류를 타고 움직인다. 그렇게 힘을 비축하여 장거리를 이동한다. 리더는 제 힘으로 날아야만 한다. 경험 많고 힘센 리더그룹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어떤 철새들은 일렬로 날기도 하는데, 그런 새들 역시 동료의 날갯짓에 의존하여 에너지를 아낀다. 이들은 옆 동료와 엇박자로 날갯짓을 하여 난류를 일으킨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는 식탁에 기대선 채 찌개 끓는 소리를 들으며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쇠재두루미떼 이야기를 읽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멘트를 모은, 허은실 작가의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에서였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8점
허은실 글.사진/예담

 

겨울이 다가오면 그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를 넘어야 합니다.

게다가 그 산맥엔

이 세상에서 가장 춥고 날카로운 바람이 살고 있죠.

하지만 새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바람을 이기려고 할 게 아니라 읽어야

산을 넘을 수 있다는 걸요.

어느 순간 날갯짓을 멈추고 바람에 몸을 맡긴 두루미들.

그 바람이 가장 높이 자신들을 띄워 올린 순간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가장 높은 봉우리를 넘습니다.”

 

배경의 힘으로 날아가고, 동료의 날갯짓에 기대 힘을 아끼고, 바람을 읽어 산을 넘는 새들. 나는 그 새들을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을 넘는, 나날이다.



 

                        <배경의 힘으로 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배경이라면.>  


 

 

 

 

우리는 하늘이 부과하는 해, 바람, , 안개, 비 등을 견뎌내야 하지만, 또한 그 의미를 바꾸고, 그것들을 상상하고 동경하며 미화할 줄도 안다. 저마다 각자의 대기 현상이 있는 것이다. 방과 후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간식 마들렌의 맛과 같이 계절들은, 그것을 회상하는 동시에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매우 선명한 친근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시에, "이젠 계절이 없어졌다"고 하는 표현은, 현재의 시간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는데다 항상 모순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콜레트는 "그 시절에는 혹한과 폭서가 있었다.(...) 어떤 겨울도 이젠 순수한 백색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 집단적 상상력을 채워주는 시적인 연상들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과 정의조차 흔들리는 계절들은 장차 위협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조용히 흘러가는 나날 속에서, 계절들은 우리에게 단조의 나지막한 소리로 인생의 축소판처럼 작은 교훈을 언제나 들려줄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계절들은 흐르는 세월과 모든 사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노화를 말해주는 동시에, 때로는 안심되고 때로는 걱정스러운 모습이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반복'이라는 역설적인 선물을 선사하는 것이다.

 

                                                                                         - 알랭 코르뱅 외 , <날씨의 맛>의 끝.

 

   나는 재채기를 했다.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책상이 꽃가루로 뒤덮혀 노르스름해진 걸 발견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손을 대면 금세 바스라져 가루로 날릴 것 같은 흰 갓털도 눈에 띄었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자 갓털은 마우스 근처까지 굴러왔다가 순간 공중에 떴고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미 책상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

   하늘과 경계를 이룬 숲의 끄트머리가 연푸르게 변해 있었다. 나는 오래 바라봤다.

   계절은 깊어지고 있다.

   나는 책을 덮었다. 노트북을 펼쳤다.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라는 문장을 썼다. 그러다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고 나는 천천히 백스페이스키를 두드려 글자들을 지웠다.

   그는, 그 작가는 말했다. 날씨로 소설을 시작하지 마라. 그만큼 흔해서이기 때문일 거다. (참고로 그는 ''으로도 시작하지 말 것을 습작생들에게 조언했다.)

 

 

 

 

   비와 빛과 바람, 눈과 안개와 뇌우. 날씨는 마음을 들쑤시거나 어지럽히고, 심지어 내가 머물고 있는 물리적 공간조차 바꿔놓는다. 말하자면 '기상 감수성'의 힘이랄까. 지붕을 없애고 벽을 허문다. 마음은 이미 비에 젖고 빛에 물들며 바람에 흔들린다. 눈으로 얼어붙고 안개로 아득해지고 뇌우로 동요한다. 그렇게 일상적 자아에서 "기상적 자아"로 손쉽게 몸을 바꾼다. 그렇게 몸을 바꾼 이들 가운데 격렬하고도 서두르는 몸짓으로 붓이나 펜촉을 적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외부 세계에는 눈이 가려진 채) 각자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상상하고 창작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이 예술은 세상만사를 '탄생시킨다'.(p188)

 

    그러므로 어린 시절 내 (거의) 모든 글(어쩌면 그림과 사진까지)도 그날의 비와 빛과 바람, 또는 눈과 안개와 뇌우에 기대 쓰여졌다. 그게 나만은 아닐 것이며, 바로 그 점을 작가는 주의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문어로 구축된 세상에서 클리셰만큼 경계해야할 것은 없으므로.

 

    하지만 날씨만큼 자신에게로 직행할 수 있는 통로가 또 있을까. 일상세계를 뒤로 한 채 서정의 세계로 진입하게 하는 통로. 때로는 그 통로가 발휘하는 힘이 강력한 나머지 통로 자체가 상징적 세계가 되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화가와 시인이 안개의 존재와 매력을 알려준 뒤에야 사람들은 안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의 <미스트>와 김승옥의 <무진기행>, 박찬옥의 <파주>를 보고난 뒤에야 사람들은 스티븐 킹과 김승옥과 박찬옥의 안개를 구별해내며, 우리는 이제 다른 눈으로 안개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템스 강의 연무는 모네가 "변모하는 세계의 정수를 파악하려" 고심하게 하고, 모네의 이런 작업은 수십년 뒤 일본 조각가 나카야 후지코로 하여금 ", 공기, 바람, 시간을 가지고 유희하며 거기서 나오는 안개로" 이뤄진 최초의 조각품을 만들게 한다. 후지코의 연무 속을 거닐고 온 사람들은 당분간 안개낀 세상을 맞닥뜨릴 때마다 후지코의 안개를 떠올릴 것이며 그들이 의식하지 못했어도 거기에는 모네가 포착하려 했던 템스 강의 연무 또한 흘러들어가 있다.

 

 

Monet - Houses of Parliament, Fog Effect 1904

 

 

 

Fujiko Nakaya:Veil, photography by Richard Barns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날씨는 일상에 무뎌진 감성을 일깨우는 뮤즈이자, 우리를 새로운 세계(어쩌면 '서정적 자아'라는 잊혀진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이며, 때때로 우리 앞에 포즈를 취한 채 새롭게 해석되길 원하는 모델이라고.

 

    어쨌든 나는 소설이 아니라 독서일기를 쓰려 하고 있다. 책상을 쓸어낸 손바닥에 노랗게 묻어난 꽃가루. 보푸라기처럼 하늘거리는 씨앗의 흰 갓털. 햇빛이 닿는 곳마다 연푸르게 돋아난 이파리. 정수리와 어깨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 때때로 책장과 갓털과 꽃가루를 날려 재채기를 터뜨리게 하는 미적지근한 바람. 훗날의 내게 오늘의 독서감각과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건 역시 날씨다. <날씨의 맛>이라는 책을 읽던 날의 날씨. 이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된 내 "기상학적 자아"가 날씨의 맛을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다시 글자를 입력한다.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나는 오래 바라봤다. 하늘과 경계를 이룬 숲의 끄트머리가 연푸르게 변해 있었다.

    나는 재채기를 했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자 갓털이 마우스 근처까지 굴러왔다가 순간 공중에 떴고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미 책상 너머로 사라졌다. 손을 대면 금세 바스라져 가루로 날릴 것 같은 흰 갓털도 눈에 띄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책상이 꽃가루로 뒤덮혀 노르스름해진 걸 발견했다. 나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

 

 

                             날씨의 맛 - 8점
알랭 코르뱅 외 지음, 길혜연 옮김/책세상

 

      덧:

      부제가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이 매력적인 부제에 이끌려 책을 집어들었다.

      알랭 코르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집필했다. 알랭 코르뱅은 '감각, 감성, 심성'의 역.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챕터별로 대표적인 기상현상과 그 기상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 감정, 감수성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냈다. 이제껏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날씨를 인간적 관점에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문헌과 예술작품을 인용하여 각각의 기상현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감성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짚어낸다. 내게는 이 책을 통해 '기상학적 자아'를 발견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새해가 밝았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다.

 

코뿔소의 평균수명은 칠십 세다

납치나 해볼까

 

나는 잠에서 깼을 때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지나간 이 두 문장에 대해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생각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이어서 좀처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른 아침 기운이 퍼져 있는 침침한 방과 옆에 누워 곤히 잠든 아내의 차분한 표정은 작년 그대로였기 때문에 나는 금세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말았다. 새해에 떠오른 생각이 무언가 의미 있을 거란 기분이 들어서 허겁지겁 적어두지 않았다면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다.

 

<2016 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오한기, "새해"의 첫

 

 

 

단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집에 들어앉은 건 아니었으니, 매해 무언가를 도모했다. 일은 이어지지 않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엎어지거나 매번 실패했으며 대체로 공상 속에서만 승승장구했다. 책을 읽거나 일기라도 쓰지 않을 때면 머릿속에서는 (      )나 해볼까, 하는 생각들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괄호 안에는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틈입하곤 했다. 그것들의 정체는 차마 고백할 수 없다. 온라인상에서라도 지켜야할 이미지란 게 있으므로. 농담처럼 쾌활하게 말해봤자 조롱받거나 오해받거나, 일 거다. 이를테면,

 

(물구나무도 섰는데) 납치나 해볼까

(스파게티를 먹은 김에) 납치나 해볼까 (p269)

 

와 본질상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었던 건 이렇게 괄호를 채우며 노는 동안에는 적어도 울적하지 않았고, 아니,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난주 시부가 집에 오셔서 진지하게 말씀하시길,

"예술은 죽어야 인정받는다. 고흐를 봐라."

나는 그냥 고개만 주왁거렸다. '인정'''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이렇게 대꾸할 텐데, 나 또한 아이의 교육과 우리의 노후를 아주 가끔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터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을 벌지 않으면 영감이 몰아닥치거나 직장이 없으면 글 쓸 시간이 솟아날 것 같았지만 겪고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삶은 의미 있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거라곤 이게 유일했다. (p268)

 

이런 식의 고백을 시부에게 할 수는 없었다. 시모는 말없이 나를 봤다가 빌려가신다고 책장에서 꺼내 들고 있던 책- 함석헌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를 만지작거리고 나는 그런 시모의 눈짓과 몸짓을 해석하느라 골치가 아팠다가 도움을 요청하듯 남편을 바라보지만 남편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졸고 있었다.

 

요즘 나는 예전처럼 그리 울적해 있지는 않다. 소설 속 화자처럼 "당나귀가 된 거 같아. 어떻게 하면 다시 거북이가 되지?" 다섯 시간이나 울부짖으면서 남편을 괴롭히다가 남편이 "당신을 달래주느니 차라리 내가 당나귀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더 이상. 예전에는 그랬다. 한달에 한번씩 규칙적으로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남편을 괴롭혔다. 최근에는 말없이 두통약이나 소화제를 먹고 밥을 배불리 먹는다. 이제 나는 주위 사람들과

 

인간의 언어로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직립보행으로 산책도 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직업을 구하고 돈도 벌어 사람 노릇도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고, 이걸로 만족한다. (p271)

 

하지만 어떤 열망에 사로잡혀 잠 못이루는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한상경처럼) 납치나 해볼까 (p285)

 

이런 문장을 밤새 만들던 소설 속 화자처럼 나 또한 다시 나만의 괄호 채우기에 몰두한다. 아마 살아 있는 한, 무언가를 향한 열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 열망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에는 현실 순응, 안착을 꿈꾸며 내 이상과 타협하려 하겠지. 끊임없이 괄호들을 제시하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엉뚱하고 난감한 괄호들이 내 열망을 더 교묘하게 부추기는 데도 말이다.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8점
김금희 외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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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었던 소설 도입 가운데 이렇게 흡인력이 좋았던 게 있었던가. 첫 문장을 읽고서 다음 문장을 읽지 않고는 못배겼다. 그러다가 난감해졌고 혼란스러웠다. 읽고난 뒤 내가 도대체 뭘 읽었는지 말할 수 없는 이 막막함이라니. 이 소설은 요약하기도 어렵다. 요약을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이 소설과는 다른 무엇이 될 것만 같다.

 

작가지망생 ''는 어느 날 '납치나 해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인 한상경이 키우던 피츠제럴드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피츠제럴드는 문학적 광기로 제정신이 아닌 한상경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주워온 갓난아기다. 나는 피츠제럴드를 '친친나트'라 새로 명명하고 비로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역시 이 소설의 매력도 헛점도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 또한 오리무중이다. 요약해보면 왠지 피츠제럴드/친친나트는 작가의 뮤즈를 빗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친친나트 때문인지 글이 잘 써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을 쓰다 막히면 친친나트를 쓰다듬었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어디에선가 해답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p291)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 소설을 분석하는 게 맞을까. 그래서 이 소설에 덧붙여진 작품 해설과 뒷쪽에 실린 심사위원들의 평을 열심히 따라 읽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평론가들은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런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지. 소설보다 더 큰 해설이랄까. 신형철 평론가의 작품평을 읽고는 특히 감탄했다. 고백하자면 소설보다 더 좋았다. 그 평을 읽고 난 뒤에는 소설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어떤 연유로 이런 소설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감히 확신하건대 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무척 즐거워했을 것 같다. 적어도 "사방이 트인 설원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숨이 막히거나, "공상만 늘어놓고 막상 행동하진 않는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테지.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도 무의미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거다. 0.9:9.1 가르마를 한 채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작가를 상상해본다. 이 소설이 내게 준 건 없다. 울컥, 했다거나 피식, 거렸다거나 멈칫, 한번 하지 않았다. 정신적, 영적, 지적 자극은 앞으로도 이 작가에게서 받을 것 같진 않다. 그건 나도 원치 않아요, 하고 작가도 주장할지 모른다. 자신을 후장사실주의자analrealist(?)라고 명명하지 않는가. 그저 자신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이들. 그렇다면 이런 걸 기대하면 될까. 소설 그 자체보다 자신의 괄호를 신나게 채워가는 누군가의 열띤 몸짓을 읽는 재미.

 

작법이 달라지면 독법도 달라져야겠지. 아마도.

 

 

 

 

 

     어느 날 저녁, 블루스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를 듣다가 블루스 음악가 찰리 머슬화

이트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가 술을 끊은 이야기를 들었다. 1987년

텍사스 미들랜드에서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우물에 빠졌다. 수백 명이

아이를 구하려고 애를 쓰던 58시간 동안 뉴스는 쉬지 않고 온통 그 소식뿐이었다.

아직 두살도 안된 제시카 맥클루어는 지름 8인치(약 20센티미터), 깊이 22피트(약

6미터)의 우물에 빠졌다. 인부들이 우물 옆의 단단한 암반을 미친 듯이 파고들어 가는

동안 아이는 자장가와 위니 더 푸우 노래를 불렀다.

      라디오 진행자들이 그 아이 이야기를 하고, 텔레비전 뉴스 팀이 사건 장소에 몰려

와 경쟁적으로 사고를 보도하고, 전국의 신문 1면에 기사가 실렸다. 이 사건은 케이블

 뉴스 채널과 24시간 방송의 뉴스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을 하러 가던 차 안에서 그 소식을 들은 머슬화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이 아이의 상황에 비하면 내 문제는 별것 아니잖아. 왜 나는 이 아이의 반

만큼도 용기가 없는 걸까? 그래서 생각했죠. '그래, 아이가 구출될 때까지는 술을 한 방

울도 먹지 않겠어.'라고요. 말하자면 내가 그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기도 같은 것이

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를 구해 낸 순간, 저도 구조를 받은 셈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레베카 솔닛 지음

 

 

                                        멀고도 가까운 - 8점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반비

 

 

1년이 지나고 다시 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분노, 절망, 무력, 불신, 수치심의 바다.  

모든 희생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면,

그제야 우리는 '구조'될 수 있을까.   

  


   해마다 봄이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즐겨 읽는다. 이제는 이상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궁금하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은 이유는 대종상 수상자/수상작에 무감해진 것과 비슷하달까.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진작에 사뒀지만 읽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각설하고 '젊은 작가'와 '문학동네'라는 두 키워드에 이끌려 웬만해서 보지 않는 전자책을 다운받았다. 결정적으로 무료였다. 

 

                                     젊은 작가의 책 - 6점
문학동네 엮음/문학동네

 

   현재 '젊은 작가'로 대표되는 작가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령,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과 현재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책, 피하고 싶은 책 또는 길티 플레져를 느끼며 읽는 책과 최근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

 

   몇몇 작가들의 경우, 작품 스타일이 그들이 아끼는 작가와 작품 들의 면면에서보다 대답하는 방식과 문장에서 먼저 엿보였다. 작가 인터뷰집을 읽는 재미랄까. 구어체로 진행되는 짧은 인터뷰임에도 그들만의 문체가 마치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드러나는 게 흥미로웠다. 


    참,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하나마나한 것처럼 여겨졌다. 청와대로 그 목록을 전달할 것도 아닌데 물어 뭐 하나. 가장 인상적인 대답은 황정은 작가의 답변이다.

      

 

헌법. 책이랄 것도 없이 법제처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초롱바탕체 13포인트로 인쇄하면 A4 용지로 17페이지도 되지 않아.

 

 

    작가들이 언급한 책들 가운데 읽고 싶은 것들을 메모해뒀다. 그 가운데 넘버 원은 이상우 작가가 십대때 점심시간에도 쉬지 않고 읽어 이틀만에 완독했다던, 존 스웨드의 <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이다. 나라면 점심시간만이 아니라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까지 쉬지 않고 읽어도 이틀만에 완독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마음만은 그러고 싶을 정도로 흡인력이 좋을 것 같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다. 질문도 몇 안되고, 답변들도 그리 길지 않으며, 수록된 작가도 열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료 ebook인 건가. 다 읽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페이지를 더 넘겨 보니 알랭 드 보통을 위시한 몇몇 외국 작가들의 인터뷰가 마치 부록처럼 실려 있다. "<작가의 책> 미리보기." 그제야 이 무료 전자책이 다른 책의 광고였음을 알아차렸다.  

 

 

  

    <작가의 책>

    영미권 작가 55인의 '독서생활'에 대한 전격 인터뷰집.

    매주 뉴욕 타임스의 서평코너 'By the Book'에 실린 글들을 엮었다고 한다. 원제도 <By the Book>이다. ("머리맡에 있는 책이 무엇이냐"원저의 첫번째 질문과 "당신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줬고 당신을 작가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보면 원제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인터뷰이'보다 그들이 읽었고 읽고 있으며 읽고 싶은 '책'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작가론 혹은 창작론이 궁금하다면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를 읽는 편이 나을 듯.


     아마존 서평 몇 개를 읽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황정은 작가처럼 대통령에게 '헌법'을 추천한 작가들이 몇 있었다는 점이다. 한 리뷰어가 오바마의 팬이었는지 반기를 들었다. 오바마는 법을 가르친 적이 있고 아마 대부분 암기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훗. 어쨌거나 <젊은 작가의 책>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처럼 여겨졌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의 질문을 고스란히 옮겨왔던 거였다. 그래, 오바마는 뉴욕타임스를 읽을 테니까. 바빠서 다른 답변들은 건너뛴다 해도 자신을 위한 추천도서 정도는 살필지도 모를 일.   

 

   자, 이제 만져보지도 못한 책에 대한 결론: 낯선 도시의 지도에서 생소한 이름들을 맞닥뜨릴 때의 설레임을 이 책에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책 - 6점
패멀라 폴 지음, 정혜윤 옮김/문학동네


   덧.

 

   1. 언제 어디서 읽느냐는 질문은 평범한 질문이지만 작가의 일상을 드러내서 좋았다. 틈날 때마다 어디서든 읽지 않겠냐고 생각할 법한데, 답변들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가운데, 이상우 작가의 '수영장을 오고갈 때 길에서 읽는다'는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수영한 뒤에는 몸의 느낌이 달라져서 독서 감각도 달라진다고. 한 외국작가는 한때 팬케이크 하우스에서 독서를 즐겨 했는데, 그곳에서는 붐비는 시간대가 아니면 눈치 보지 않고 오래 앉을 수 있는 데다가 무려 갤런 사이즈의 커피를 줬다고 했다. 갤런이라면 대략 3,000리터다. ㅋ

 

  2. 누군가 꼭 써줬으면 하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이스 캐럴 오츠가 거의 완벽하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런 책이 존재할 수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네요. ㅋㅋ 

 


   아름다운 산문으로 된, 풍부한 상상력이 깔려 있고, 깔끔하며 솜씨 있는, 압도적인 이야기와 독자를 사로잡는 흥미진진한 인물 덕분에 단순히 그 책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해도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심리언어학, '마음에 관한 철학', 그리고 '초끈이론'의 발견들을 그 발견자 또는 창안자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어요.

 

 


 

 

 

책을 읽다 말고 눈을 감는다. 눈이 침침했다. 건조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할 일을 미뤄두고 책을 읽던 중에 무언가가 나를 툭 치고 갔다. 오랜만에 감각이 예민해져 있다. 최근에는 집중하는 일이 어렵다. 잠시 뒤 문장 하나가 떠올랐고 그제야 무엇이 마음을 어지럽혔는지 깨달았다.

 

"자의식은 거대한데 자아는 없다."

 

나는 눈을 뜨고 페이지를 앞으로 넘긴다. 

 

제임스 우드라는 문학비평가는 최근 "소설이 불필요한 사실과 언어로 비대해지고 있다고, 특히 미국 소설이 그렇다고" 믿었고, "그 결과, 최소한 미국에서는, 자의식은 거대한데 자아는 한 톨도 없는 소설들이 판을 치게되었다"고 말했다. "수많은 걸 알고 있지만 사람 한명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주목을 받는 정말 '똑똑'한 소설들"...

 

나는 은연중에 이 문장을 소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것으로 읽었다. 불필요한 감정과 욕망으로 비대해져 거대해진 자의식, 그러나 자아라곤 한톨도 없는 인간. 헛똑똑이.

 

혹독하네. 좀 억울해지는 걸. 

 

살살 좀 하자고 내 안의 비평가에게 고해본다. 

그는 오랜 세월 나를 비평해왔다. 자신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는 자신이 나를 잘 안다고도 믿는다. 그의 단호한 믿음에 여전히 의기소침해지곤 하지만 요즘에는 그와 팽팽하게 각을 세울 때가 많다. 좀 컸다 이거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대놓고 떠드는 사람을 보면 경계심이 생긴다. 

 

나는 가까운 친구로 지낸 세월 덕에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생각한 남자와 결혼했다.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중요한 순간-거창하게 말하자면 인생의 여러 '첫 장면'들-을 지켜봤다. 그렇게 보낸 근 십여년간 깨달은 게 있다. 나는 볼 수 있는 것만 볼 수 있었고 그것조차도 정확히 본다는 보장이 없었다. 

 

인간에게는 그/녀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각지대들이 있다. 어쩌면 그곳이야말로 그 사람의 고유성을 보여줄지도, 그곳에 그 사람의 진짜 자아가 거하는지도, 때로 그 사람의 비대한 자의식에 가로막혀 그 자아가 보이지 않는지도, 그 자의식이 자아를 지키기 위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내가 그렇게 거대해진 자의식으로 지키고자 애쓰는 게 내 자아가 아니라 자아상이라는 의심이 들면, 마음이 엉클어진다. 오늘처럼.

.

.

 

         그래도 적당히 좀 하시지. 쳇.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 - 8점
존 프리먼 지음, 최민우.김사과 옮김/자음과모음

 

 

덧.

 

1. 지은이가 인터뷰한 70명의 작가 가운데

모르는 작가가 태반이고, 읽어본 작가는 손을 꼽는다.

책의 지은이, 존 프리먼이 세계적인 편집장이라는데 처음 들어봤다.

그래도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지은이의 '여는 글' 때문이다.

<당신과 나>라는 제목의 자전적 글이었는데, 지은이의 독서이력과 그를 소설의 세계로 인도한 결정적 작가인 존 업다이크와의 두 번의 만남, 그 사이에 부침을 거듭했던 삶의 편린들이 단정한 문장으로 쓰여있다.

그의 이야기와 문장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집중시키는 데가 있었다. 이 인터뷰집에 대한 기대감은 (그가 만난 작가들보다) 순전히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단 한 명의 작가와 지은이의 '여는 글'만 읽어도 이 책을 만난 보람이 있을 듯.

 

2. 제임스 우드라는 (소설가이자 하버드 대학의 문학교수이기도 한) 문학평론가에 대한 외모 묘사를 읽다가 웃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죄송스러워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그는 토니 모리슨을 보고 "자기 등장인물보다 자기가 하는 말을 더 사랑한다"느니, 존 업다이크에게는 "책 쓰기를 자제하는 것보다 하품을 참는 게 더 쉬운 일처럼 보인다"느니 하며 신랄하게 쏘아댔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죄송스러워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깡마르고 상냥한 영국인"이라고 하니 웃음이... ㅎ  

작가들은 평론가를 참 싫어하겠어.   

 

3. 어느 인터뷰집에서든 '무라카미 하루키'는 빠지질 않네...

 

4.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지은이가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역시 처음 들어본) 문학 계간지 <그랜타Granta>의 편집장으로 지내면서 인터뷰한 이들로, 이른바 "세계문학의 얼굴들"이란다.

그러니까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의 원작자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있지만 조앤 K. 롤링은 없다. 

그런데 이언 매큐언은 있는데 줄리언 반스는 왜 없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있는데 닉 혼비는 없다.   

 

5.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쓴 철학자, 로버트 M. 피어시그와 웬만한 소설보다 더 흥미로웠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신경학의, 올리버 색스.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 이름에 반가움이 앞서긴 했다.

두 사람 모두 철학자나 신경학의보다는 저술가로서의 아우라가 강하며 위의 두 작품 모두 소설처럼 읽히는 에세이 같았다.

어쨌든 이 인터뷰집의 기묘한 다양성을 짐작(만)했던 이유.      

   

 

 

 

   필사적으로 뛰어내려오며 안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난 그런 기도 안 했어. 그냥 눈이 오게 해달라고만 했단 말야. 그 말이 맞았다. 안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서양 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에서처럼, 그리고 목성과 화성과 명왕성에까지 눈이 펑펑 오는 꿈을 꾼 적이 있을 뿐이었다.

 

   1976년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이란 이름은 천체에서 사라졌고 그리고 화성에 내리는 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그것은 지상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 은희경 단편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표제작의 끝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예전과 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Y언니와 S언니의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K언니는 손을 무릎에 놓고 시선을 내리 깐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문득 Y언니가 하던 말을 멈췄다. 언니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 온다."

   우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어두웠다. 시간은 벌써 아홉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도로 건너편에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걷는 게 보였다. 검게 번들거리는 도로에 동그란 빛을 드리우며 차들이 줄지어 오고갔다. 

  "어데?"

  "나도 안 보이는데..."

  "저기 눈 오잖아."

  다들 왜 못 보냐고 혀를 차는 Y언니에게 언니는 노안이라 멀리 있는 게 잘 보이나 보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언니는 웃지 않았고 왜 자신한테만 보이냐고, 진짜 안 보이냐고, 저기 내리지 않냐고 거듭 말했다. 나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갖다댔지만 뭔가 내리는 기색을 느끼지는 못했다. S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 속에선 좀 보인다. 뭐가 내리긴 내리네."

  "우산 안 쓰고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잖아. 진눈깨비인가 본데."

   우리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똑같이 중얼거리는 거다. 

   "눈 온다."

   이어지는 침묵.

 

   첫눈의 힘.

 

   다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으려다 나는 말을 멈췄다. Y언니와 S언니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이 탁구공처럼 가볍게 허공을 오갔다. 나는 핑퐁의 어감이 참 핑퐁스럽다는, 그래서 탁구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K언니는 여전히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K언니의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언니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나는 자주 묻는 사람이다. 결혼초에는 남편에게 곧잘 묻곤 했다. 내가 그렇게 묻고 싶어지는 순간 남편이 짓고 있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해독할 수 없는 표정.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이 첫사랑 따위를 생각할 거라 의심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고, 그저 나란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당시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내게 생각은 빈 공간을 못견디겠다는 듯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지겹게 리플레이되는 노래소절이라도 머릿속을 채웠다.

   최근에는 그런 질문을 한 기억이 없다. 이제 남편은 생각이 많아졌다. 굳이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예전처럼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에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그런 연배에 접어들고 만 것이다. 빼도박도 못하는 중년.

 

    나는 두 언니의 웃음소리에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뗐다.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와중에, 예전과 달라진 세상, 사람, 관계에 대해 설전을 벌이던 두 사람이 소리내어 웃고 있었고 K언니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2015년.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젖은 눈이, 내게는 올해의 첫눈이 되고 말았다.

 

   첫눈이 소담한 함박눈이라면 좋겠지만, 대개 첫눈은 이런 진눈깨비이거나 싸락눈이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먼지같은 눈인 것 같다. 금세 사라지거나 곧 비로 바뀌어버리거나. 

   그런 면에서 첫눈은 첫사랑을 닮은 것 같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첫사랑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려왔던 식으로 찾아왔을까? 혹시 첫눈인줄 알았는데 먼지였다거나, 먼지인줄 알았는데 뒤늦게 눈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녹아버린 뒤였다거나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화성에 내린 눈'처럼 지상에 닿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눈.

   그 어정쩡한 첫눈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눈이 내린다.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압도적인 눈.   

 

   물론 처음부터 쏟아붓듯 내리는 첫눈도 존재하겠지만, 첫눈은 '첫'에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서 훗날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것에 불과할지라도... 

  어쨌거나 "단 하나의 눈송이"로 기억되는 것이다.

 

 

 

  덧. 

 

   1. 이 단편집으로 은희경 작가가 2014년 황순원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은희경 소설 가운데 <새의 선물>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든 책. 

       

 

 

  

  

   2. 첫사랑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 

   1988년 도봉구 쌍문동에 거주하던 성덕선양 못지 않게 슬픈 사연이 있다. 

   한때 그리도 열렬히 사모했건만... 

   커밍아웃해버릴줄이야. 

    .

    .

    내 첫사랑은,

    WHAM!의 조지 마이클. ㅠ.ㅠ 

 

 

 

 

 

 

                      아직도 LP로 애장하고 있는 조지 마이클의 싱글 앨범!

                        그러고 보니 이 앨범을 선물해준 고교베프는

                        QUEEN의 프레디 머큐리의 빅팬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또한... ㅠ.ㅠ

                        적어도 내 첫사랑은 아직 살아 있다~!

                        열살쯤 어린 남친과 함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