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모든 매혹은 똑같은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내면의 빈 곳에서 오거든요.”

그는 검지로 가슴을 쿵쿵 쳤다.

“뭐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채워야 하거든요. 책·그림·사람, 다 똑같단 말입니다….”

                        - 당 신 을 믿 고 추 락 하 던 밤(The Blindfold by Siri Hustvedt)


0. 매혹적인 이야기.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1. 첫문장에 붙들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완독한 게 얼마만인지. 격렬함 뒤 찾아오는 나른함이랄까. 책을 덮고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2. 각각의 단편 속에서 감수성 예민한 문학전공 대학원생 아이리스는 사랑과 예술, 이상적 자아와 낯선 자아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개성 강한 인물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인물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 흥미로운 점은 한 인물의 기행에 가까운 행태가 다른 이야기 속의 아이리스에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죽은 여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모닝 씨라든가 자아가 분열된 O, 기괴한 연출에 열중하는 조지의 모습은 아이리스가 스스로 발굴해내는 내면의 모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연작소설집이지만 마지막 수록작은 앞선 세 작품을 시간적으로 품고 있다. 불현듯 끝나버리는 엔딩이 앞선 세 단편에서는 매력적이었으나 마지막 단편에서는 다소간 허탈. 아이리스의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 듯하지만, 다른 결말들에서처럼 깊은 여운을 맛보진 못했다. 어쩌면 읽느라 지쳤는지도. 하지만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은 대부분 마지막 단편에 모여 있었다. 

3. 마지막 단편에서 아이리스가 그림을 묘사하는 대목. 첫번째 단편에서 모닝이 죽은 여인이 남긴 소지품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 기억을 기억하는, 사후의 삶.

"현실의 빛이 아니라 내면의 빛이랄까, 강력한 기억의 빛이에요.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지난 일처럼, 이미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마 그래서 나중에 그렇게 강렬한 효과를 낳나 봐요. 내 말은 그 사물 자체가 기억이고 사후의 삶이고, 그래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거라는..."


4. 소설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한 대목.  

"그 여섯 블록은 오디세이가 무색했다. 시각과 함께 평형감각이 사라졌고 나는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머릿속으로 한 블록 한 블록을 헤아려 전진했다. 마이클이 인도하려고 팔을 뻗었지만 난 그를 밀어내며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5. 때로는 한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둬야할 말도 있다. 

"말이 시간을 두고 가라앉아야 할 때가 자주 있죠. 있잖아요, 한동안 땅 속에 묻어두는 거."







0. <꿈의 해석을 읽다>를 드디어 완독. 대표적인 중화권 인문학자라는 '양자오'가 지었고, '유유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어쩌다 보니 올 들어 유유출판사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됐는데, 작가들이 하나같이 목소리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들려준다. 프로이트를 해설한 이 책 또한 무겁지 않다. 부제가 '프로이트를 읽기 위한 첫걸음'인데, 그 첫걸음으로 완벽하다! 쉽고 재미있다. <꿈의 해석>보다 더 재미있을까 봐 염려될 만큼 재미있다;;

작가는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그 인물이 놓인 '19세기 유럽'이라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배경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적 배경지식이 확장되며 당대를 풍미한 예술사조와 철학까지 훑게 되니, 이 자체만으로 풍성한 독서체험이라 할 만하다.

책은 들고 다니기에 딱 좋은 사이즈이며, 뒷날개를 접어 책갈피로 이용하게 만든 센스 또한 마음에 든다.

자자, 입문서도 읽었으니, 이제 십수년 간 책장에 꽂아만 뒀던 문제의 <꿈의 해석>을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설마 버리진 않았겠지?!

 

1. 오늘 내가 낚인 기사는, 한 유명 배우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사칭하고 자신에게 성적 모멸감을 준 네티즌을 고소한 기사였다. 정신병자, 관심종자, 스토커라고 질타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그의 지인이 남긴 듯한 댓글을 주목했다. 그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짓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의 블로그와 인스타까지 찾아봤다. 그는 자신을 킹메이커라고 믿고 있었고, 종국에는 대권을 잡으려는 야심찬 꿈을 꾸고 있었다.

 

2. 이상과 망상, 정상과 비정상,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요즘처럼 온갖 음모론과 피해망상이 널려 있는 시대에서는 이 경계가 매우 흐릿한 것 같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심리 기제의 운용이 다소 극단적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쪽에는 정상인이 있고 저쪽에 정신병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한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 이후의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내재된 정신질환을 자각했다.... 20세기 예술은 기본적으로 광기의 예술이자 정신분열적 예술이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을 의자에 눕히고 끊임없이 기억을 되돌려 자기 자신의 비참함과 내면의 어둠을 깨닫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의 괴물을 새기거나 그리거나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제거하고자 노력했고, 이로 인해 20세기 현대 예술이 출현했다. (p188-189)"


3. 어제 한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했다.

"그 책에 고등학생의 존속살해 사건이 나오거든. 실화야. 충격적인 뉴스여서 우리도 언젠가 듣긴 들었을 거야. 기억 안 나? 뭐 우리랑 상관 없는 이야기겠거니 싶어 아마 쉽게 잊었겠지. 일제고사 전국등수가 서울대에 들어갈 만큼 좋았던 얘였는데, 성적이 떨어져서 엄마한테 체벌을 받은 거야. 처음에는 회초리, 나중에는 골프채, 야구방망이, 뭐 이런 식으로 강도가 높아지다가 애를 며칠 씩 가두고 밥도 굶겼다네. 정신 좀 차리라는 뜻으로. 그러던 어느 날 이 애가 충동적으로 엄마를 살해한 거지. 사흘간 잠도 못 자고 굶고 매타작을 당했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애는 이해하지 못해. 일시적인 정신착란, 뭐 그렇게 된 거지." 엄마를 흥분시킨 그 첫번째 일제고사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 이 아이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아이는 평..했다고 했다.

 

4. 그 엄마도 평..한 여자였다고 주위 사람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5. 언젠가 고교시절 베프가 호들갑을 떨며 한 동창에 대해 말해줬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였다.

"같은반이 아니어도 알 만한데. , 서울대 갔잖아, 진짜 기억 안 나? 그냥, 평범해. 공부만 하던 얘였는데... 그게, 그만 실연하고 정신줄을 놨댄다. 무슨 상처를 어떻게 받았는지... 학교 그만두고 집에 와 있대. 연애를 얼마나 지독하게 한 건지. 그럴 얘가 아닌데."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인간은 모두 잠재적인 정신병 환자다. (p186)

무척 연약한 존재인 인간은 강한 억압을 필요로 하는 경험과 맞닥뜨리면 아주 쉽게 정신병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미치는 것은 실연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실연의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미칠 위험에서는 도리어 멀어질 수 있다.(p168-169)

 

6. 오래 전, 고등학생 때. 현관문 앞.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 사춘기였으니 모든 게 다 짜증스러웠겠지.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꽤 억눌려 있었다. 멱살 잡힌 채 끌려가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얘 왜 이러니,' 그런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감정을 폭발하는 순간에도 엄마의 표정을 예민하게 살폈고 이성이 멀쩡하게 작동하는 걸 의식하곤 내심 한탄했다. 왜 나란 인간은 이런 순간에 정신줄을 놓지 못하지. 확 놔버리면 좋을 텐데. 아주 시원스럽게 내질러버린다면, 엄마가 황당하게만 나를 쳐다보고 있진 않을 텐데. 내 감정을 좀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텐데. 엄마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집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다.

 

7.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프로이트의 입을 빌어 말하자면, 나는 정신줄을 놓을 만큼 억압받진 않았던 거다. 고작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릴, 딱 그 정도 폭발할 만큼의 억압이었던 거다. 그저 전형적인 사춘기를 앓았을 뿐. 어쩌면 그 정도의 미약한 분출이라도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릎끓고 앉아 성경을 펼쳤는지도...

 

8. 틈틈이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들을 맞닥뜨리곤 한다. 길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뉴스와 풍문을 통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 나는 그게 언제나 궁금했지만 결코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저 너머의 일이니까. 비정상과 비현실의 세계에 내가 거주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그 세계가 만인에게 열려 있다고,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여기 도처에 입을 벌리고 있다고 느낀다. 수면 위로 3년만에 끌어올려진 세월호가, 그 처참하게 상처입고 돌이킬 수 없이 부식된 모습이, 이 세계와 우리 내면에 도사린 어둠의 은유 같다. 우리가 결국 '실패'했다면, 계속 '억압'당했다면, 끔찍하게 변형되고 뒤틀린 채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겠지. 1073일만에 심연 속에서 건져낸 건, 어쩌면 우리의 인간성인지도 모르겠다




         건물을 나왔을 때 생각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나는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도 마음이 가벼웠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카페와 박물관을 지나 작은 내천을 따라 걸었다. 공터마다 작은 아트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앙증맞은 액세서리와 수제 가죽가방 들, 다소 독특한 컨셉의 의류, 다양한 식자재로 만든 수제쨈과 식혜 들, 봄을 불러들이는 듯한 파스텔톤의 향초들. 띄엄띄엄 놓인 가판대 사이를 사람들이 한가하게 기웃거렸다. 옷을 구경하던 중년 여자가 다른 쪽에서 향초를 구경하는 친구를 호들갑스럽게 손짓하며 불러댔다. 그들은 소매에 날개가 달린 흰색 가오리 긴팔셔츠를 보며 예쁘다고 감탄했다. 그러자 내게 옷을 보여주던 젊은 여주인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원피스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실내복은 여주인이 권했던 것이었다. 나는 옷 자체보다 그녀의 말에 붙들려 있었다. 말을 재치 있게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그 원피스를 '분리수거'하러 나갈 때 입고 나간다고 했다. “넘 예뻐서 다들 깜짝 놀란다니까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따라 웃었다. “이거 대박난 옷이에요, 검은색은 이거 하나 남았어요.” 여주인이 다른 이들에게 간 틈에 나는 19,000원짜리 분리수거복을 행거에 그냥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때마침 아이가 나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르르 달려와선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딴 짓은 이제 그만 하자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러고는 자기만 따라 오면 길을 잃지 않는다면서 자꾸 남서쪽이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는 남서쪽으로 가야 해. 엄마는 나만 따라 와. 지난번에 엄마 때문에 우리가 엄청 헤맸잖아. 기억나지, 엄마?” 우리는 대충 남북을 가늠한 뒤 느긋하게 걸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북동쪽으로 걷고 있었지만 아이는 남서쪽'으로 맞게 가는 중이라 우겼고, 방위와 상관없이 직관적으로 걷고 있었으나 우리 모두 맞게 가고 있다고 믿었다


            단 둘이 산책하는 건 오랜만이었다다양한 연령대의 커플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걸었다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대기는 산책하기 좋을 만큼 적당히 데워져 있었다.햇빛에 섞여 노르스름하고 어쩐지 달고나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바깥 공기를 쐬면서 아이는 기분이 유쾌해진 듯했다. 표정과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 이상 무표정하게 시간을 견디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 시간 남짓 아이는 굳은 얼굴로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있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선 안내책자를 만지작거리던 아이. 앞을 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던 아이. "너 원하는 대로 해." 엄마에게서 선택권을 건네받았지만, 사실은 자발적으로 수업을 선택하도록 교묘하게 설득당해 버린 아이. 그때와는 다르게 아이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빛내며 주위 풍경을 살폈고 쉴새없이 조잘거렸다. 


           "엄마, 나만 따라 오면 돼." 

           엄마를 리드한다고 믿고 있을 아이의 기분을 생각해봤다. 

           아이의 '남서쪽'에 대해서도.       





독감 백신이 백신 가운데 가장 효과가 떨어진다지. 알려져 있다시피, 독감 바이러스가 계속 변하고 있는 데다가 그해 유행할 균주를 추측하여 백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독감 백신을 맞히지 않았다

 

올 겨울 나는 그걸 조금 후회했는데,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독감에 걸렸기 때문이다. 올 겨울은 독감이 유난을 떨었다. 아이네 반의 경우에는 1/3이 독감을 앓았다. 아이가 다행히 크게 앓지는 않았지만아이도 나도 일주일 간 집안에 격리되다시피 했기에 하필 그 기간에 잡혀 있던 중요한 일정들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승률이 매우 낮은 게임이 아닐까 여전히 생각했다.

 

<스켑틱> 코리아판 8권에 실린 독감 백신에 대한 컬럼을 읽고서 나는 다른 관점으로 독감 예방 접종을 바라보게 됐다. 감염성 질환 전문가 마크 크리슬립은 독감 백신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에 맞서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인구 집단이 받는 혜택은 백신을 맞는 개인에 의존한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공동체 안에서 독감의 전파 속도를 낮추어 집단 면역성을 높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유아, 면역계가 약화된 사람, 임산부, 노인을 위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할머니를 위해 독감 백신을 맞으세요."

 

그러게, 올 겨울에는 나도 독감 백신을 맞아볼까

 

인간은,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 내가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니므로, 또는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므로 무심코 내려지는, 나라는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개인의 결정들이 결국 어떻게든 바깥세상에 영향을 준다.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크게 퍼져나가는 파장. 그건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지

몇 개월째 그걸 사뭇 초현실적힌 형태로 목도하는 것 같다.


             




지난여름 나는 계속 아팠습니다. 그 아픔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져 붉은 피가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숫자와 그래프로 증명되는 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호소할 수 없는 고통만큼 괴로운 것은 그것이 나를 고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의 첫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고 언젠가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때마침 자리를 비운 제3자에 대해 말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는데,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내가 바로 그 작은집의 맏이인데, 내가 모르는 다른 작은집 아이들이 있는 건가. '너희들'이라는 2인칭을 '작은집 아이들'이라고 3인칭화시켜서 표현한 것이 듣는 이의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배려인 건지 순화시켜 표현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청자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거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청자를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냥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바꿨다. 그때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게 억울했을까. 그 말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끝 쩌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의 맥락상 그 '약하다'는 형용사는 신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인 특성을 꼬집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약하다' 또는 '유약하다'이겠지.

 

  내가 봐도 큰집 아이들은 독한 데가 있었다. 큰애는 일찌감치 사시에 통과해서 두 아이를 시댁에 맡겨두고 지방법원을 돌고 있었고, 둘째는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넷이나 키우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뒤늦게 원하는 방식대로 살겠다고 철밥통 걷어차고 집에 주저앉은 꼴이었고, 남동생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모처럼 두 사촌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왁거렸지만, 그때만 해도 그 대화의 결론이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는 게 될지 정녕 몰랐기에 "대단하네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 정녕 속없다. 역시 추석은 관계를 해치고 정신건강에 해롭다.

 

  하지만 그 말에 자존심을 다쳤던 이유는 그게 내 급소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촌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워낙 출중했다. 하지만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본 적은 없었다. 그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도 한 몫 했고, 결정적으로 워낙 기질이 달랐다. 말과 해마를 비교할 수 있나? 우리들의 부모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집'의 우리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그러니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큰어머니와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날아온 화살에 거의 절명할 뻔했다. 상처로 남은 건 그걸 상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나 또한 큰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난생 처음 맛보는 열패감과 무력감으로 어쩔줄 몰랐다. 내 선택에 대한 의심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가족 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때조차 내 자신이 징징거리는 것 같아 그 또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내가 남동생의 공황장애를 그저 연민으로만 껴안을리 만무했다. 남동생의 힘들고 괴롭다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한 신세한탄처럼도 들렸다. 내 자신과 남동생에 대한 그런 감정들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내가 감추려던 게 들통난 셈이었다. 그때 친정엄마가 옆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큰어머니의 말은 앞으로도 그냥 내 가슴에, 그리고 이 공개적 일기장에 묻어두는 걸로.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제목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제목이다. 참 잘 지었다. 당신이라는 안정제...라니 시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나는 '힐링', '괜찮아' 류의 책들이 지겨웠다. '괜찮지 않다' '아프다' 그러니 그냥 '미워해도 돼' '원하는 대로 살아' 류의 책들도 지겨웠다. 그런 책들이 감성적으로 포장하고 심리학적으로 무장한 조언들이 허무하게 보였다. 책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이미 '괜찮은' 거다. 너무 아프고 아주 괜찮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은 소용없다. 그들에게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고, 이 책 또한 그저 값싼 위로의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애당초 생각했던 것처럼 이 책은 감성에세이가 아니었다. 우울증을 앓는 이와 그를 오래 상담한 정신과의 사이에 이뤄진 일종의 대화였다. 나는 작가 김동영의 용기에 놀랐고,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 한 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지금, 두 작가 모두에게 감탄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니까 내담자만이 아니라 상담자 또한 솔직하게 자신을, 자신의 상처와 괴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까발린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김동영 작가의 경우에는. 이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병에 지지 않을 것이다. 아픈 자신을 대면할 용기가, 그걸 다른 이들과 공유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상담의 또한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환자들의 '눈물 앞에 앉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걸 힘들어하는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한 채 '다시, 눈물 앞에 앉'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전하는 조언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아픈 사람은 정작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어쩌면 덜 아파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혼자만 아픈 건 아니라는 것을요. 모두가 같은 감정과 고통을 느끼며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그 말에는 좀더 밝고 건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다시 일상으로 그리고 나의 도시 서울로 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갇혀버린 저를 미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 옆에는 이런 날 그냥 지켜봐주고 마음 써주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으니깐요. 설사 그들이 제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겁니다.

 

건강하십시오.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세요. 힘들면 당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분명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겁니다. 만약 없다 하면 시들어빠진 꽃이라도 있겠죠. 그걸 통해 위안을 받으십시오. (p259)

                       

                                                                                                    - 김동영


창문도 없는 작디작은 이 진료실에서 팔 년을 일했다. 그동안 나는 달라졌다. 내가 그걸 느낀다. 감정이 새어나가는 느낌. 어느새 눈물도 말랐다. 어떻게든 내 진심을 전달하고 싶은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우울해서 무거운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아 무겁기만 하다. 마음이 멈춰서버렸다.

 

... 그냥 서글펐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더이상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슬펐던 거겠지. 변해버린 나란 사람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다시 출근. 비밀번호를 누르고, 연구실 문을 연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메일을 확인하고, 책을 잠깐 읽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아홉시다. 가운을 걸치고, 진료실로 내려간다.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다시, 눈물 앞에 앉았다. 이전처럼 나는 그들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 (p249)


                                                                                                       - 김병수




  '내 인생의 책'이라는 수사는 부담스럽지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내게는 그렇게 부를만한 책이다. 그 때문에 며칠 전 도서관에서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란 책이 반납함에 놓여있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페터 비에리의 필명이다. 나는 그가 소설 쓰는 언어철학자임을 진작 알았지만 그가 '내 인생의 책'의 저자임에도 그의 철학서(?)들은 찾아본 적이 없다. <자유의 기술>.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만 봐도 딱히 흥미가 일지 않았다.

  

  일단 그 책을 집어든 건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 때문이었지만, 내가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독일어 원제는 해석 불가. 영어 제목은 <Human Living: A Way of Dignity>. <삶의 격>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요즘 '존엄dignity'라는 말에 꽂혀 있다.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면 장소를 불문하고 울컥하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다. , 나이 탓인가. 훌쩍. 어쩌면 현실세계에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인지도. 그도 아니면 나 또한 강팍하게 살아가느라 '존엄성'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심리적으로 몰리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안정제'가 필요하다. 친정엄마에게는 "니 모습 그대로 족하다"고 말해주는 하나님이 '당신의 안정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이거나 친구일지 모른다. 내게는 대체로 책이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치료가 절실한 경우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이 경쟁사회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벼랑으로 모는 것 같다. 존엄성을 위협하는 사회, 직장, 학교, 가정, 관계들. 하지만 상담이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정신과의나 전문상담가를 만나는 일에 쉬이 발걸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삶의 격>에서 이런 일화가 소개된다. 작가 페터 비에리는 언젠가 약국에 갔다가 이웃이 정신병 치료 약품을 받아 가는 걸 보게 된다. 이웃이 창피한 듯 눈을 내리깔자 그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다. "저도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간이 안 좋다 뭐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머리니 신경이니 뭐니, 이러다가 당최 뭐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결국 커피를 마시러 간다. 그걸 계기로 종종 그들은 같이 커피를 마신다. 그는 이 일화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의 존엄성은, 내면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모래성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심으로부터 인간 사이의 연대감이라는 값진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p99)

 

작가는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치료를 받으러 가는 행위는 존엄성의 표출이며 상처 입은 허영심을 존엄성의 훼손이라고 오해하는 거짓 자존심을 거부한다는 단호한 표현이다.

 

  어쩌면 전문가들을 향한 '첫 발'을 떼기 어려운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안정제>'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공감받지 못해 고독한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유약하다'는 타인의 판단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두 저자는 따뜻한 ''을 내어줄 것이다내게 그러했듯 말이다.






게일 레빈의 평전, <에드워드 호퍼:빛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를 읽고 있다. 뒤늦게 두번째 시도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오래 전, 호퍼의 그림에 처음으로 매혹당한 즈음에 읽다 지쳐 덮은 모양이다.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평전이니, 앞으로도 몇 번 더 벌어질 일일지도...

  

 

나이트호크(1942). 호퍼는 이 작품을 통해 이른바 미국식 리얼리티를 창출해냈다. 그가 이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 부부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조는 지인에게 고백한다.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 누군가의 손을 빌어 남겨진 소크라테스의 어록 탓이다. 그녀로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자신을 변호할 길이 없다.

호퍼는 아내 조를 '나의 크산티페'라고 불렀다. 조는 크산티페와는 달리 자신을 철저하게 변호했다. 미래의 독자를 다분히 의식해 쓴 일기를 남긴 것이다. 이들 부부의 경우에는 호퍼가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 심지어 그녀를 비꼬아 그린 듯한 연필스케치까지 남긴 마당에. 단지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 시대배경과 그의 기질, 그가 남긴 인터뷰와 편지, 그리고 그의 작품 등으로 그의 심리상태를 짐작할 따름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재독을 통해 내게 강렬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에드워드 호퍼가 아닌 조 호퍼다. 이 책이 조의 디테일한 일기를 밑천 삼아 쓰여진 탓도 있지만, 내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기혼여성이라는 스텐스를 내내 의식한 채 평전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 며칠 영드 <닥터 포스터>에 빠져 있어서인지도.

 

 

방영 천만명의 시청자수를 기록했다는데 왠지 그 중 9백만은 기혼여성일 것 같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앞두고서 여주의 행보(아마 복수의 방식)에 대해 댓글이 구백만개나 달렸단다.

 

각설하고, 호퍼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지극해도 이번에는 조에게로 시선이 간다.

예술가적 자의식과 아내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몇몇 고백은 그로부터 반세기나 훌쩍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일기장에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채 쓰여질 것 같다.

 

- 매 끼니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일은 나를 지독한 하이에나로 만들었다.


- 한때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고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았는데지금은 나 자신이 부엌데기일 뿐이고 어디에도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 부엌데기의 책임과 다른 생활은 없이 그저 피로와 심술 그리고 성가심으로 가득 차 있다.

 


1939<독립적 여성>이란 잡지에 "당신과 당신의 자동차"란 글이 실렸다. 제럴딘 사테인은 "자동차 운전의 성공에서 오는 힘에 대한 자의식"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달걀 거품기를 다루는 것보다 무한하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서글프다. 하다못해 오븐도 아닌 달걀 거품기라니...)

 

 

Jo in Wyoming(1946)

 

당시 조에게도 운전을 마스터하는 게 중차대한 미션이었다. 어디든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뜻했다. 그리고 "남편의 요구, 취향, 두려움으로부터 제한 받지" 않는 길이기도 했다. 조의 운전으로 빚어진 부부싸움이 '육탄전'(맙소사!)으로까지 빈번하게 확대됐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와 생물학적, 심리학적 동등성을 달성"하려 했던 한 여성의 욕망과 관계/힘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남성의 불안이 운전대를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조는 1944년도의 일기에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충동"으로 세가지를 뽑았다.

"미술을 통한 표현, 성 그리고 운전."

 

특히 운전과 미술에 대한 '충동'은 갈등의 주된 테마였다. 조는 호퍼가 자신의 미술 본능을 미묘한 방식으로 죽이는 것처럼 여겼다. 어느 날에는 호퍼가 미술관 직원에게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 자기 아내로만 소개했다고 조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녀의 일기 속에서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부엌데기처럼 여겨져 크게 화내다가도 그런 감정발작에 죄의식을 느끼고는 그래도 "내 사랑하는 에디는 집안일을 함께해 주잖아" 하고 자신을 위로한다. 그리고 아무도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남편의 면박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작품들을 갤러리로 보내곤 한다. 침체기에 빠져 까칠해진 그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날이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 인간이라고 일기장에 성토하다가도 그가 성공적으로 다시 작업에 임하면 깊이 안도한다. 사람들을 꺼리는 남편 대신 그의 작품을 평단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캔버스 앞에서 그가 요구하는 다양한 포즈를 적극적으로 취하며, 그가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 언제나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머물 곳이 앉을 데도 없는 부엌과 침실 뿐이라면서 한탄한다.

 

평전에서 언급된 조의 일기를 읽다 보면 '전쟁 같은 사랑'이란 말이 불쑥 떠오르곤 했다. 격렬하게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어물쩡 넘어가는 일이 평생 반복되는 것 같았다. 여느 부부 같으면 십년이면 적당히 포기하고 살 텐데, 이들 부부는 각자 동일하게 지닌 예술가적 자의식과 욕망 때문인지 끝도 없이 서로를 밀치고 끌어당긴다. , 아직까지 읽은 바로는 그렇다. 여하튼,

 


   호퍼 그림 속에 빈번하게 드러나는 '고독'과 '단절'의 이미지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운전대와 방 하나만 내줬다면,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 방향과 표정의 온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철로 변 호텔, 1952, 캔버스에 유화

 

 

뉴욕의 방, 1932, 캔버스에 유화

 

 철학으로의 소풍,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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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란 인간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쓰릴러도 그 결말을 확인하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평전의 마지막을, 호퍼의 마지막 그림과 그녀의 마지막 일기를 미리 훔쳐 봤다.

 

 

두 명의 희극배우, 1965, 캔버스에 유채

 

호퍼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두 명의 희극배우>에서 자신과 함께 조를 피에로로 등장시킴으로써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와 영예를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그녀가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 조는 여전히 정물화를 그렸다. 그리고 호퍼가 죽은 뒤 채 10개월도 되기 전에 84세의 나이로 죽었다. 내가 건너 뛴 어느 페이지에선가 그들은 평온해졌나보다.

 

그녀는 이렇게 일기의 "마지막 장을 접는다."

 

나는 내 자식들(조의 작품들)로 가득 찬 9제곱미터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다. 거기에 내 삶의 기록이 있다. 나는 여기저기서 편안함을 느끼고, 다시 살고, 작은 새끼들과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여성들이 미술보다는 사람들과 삶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배웠다. 그들은 두 가지를 다 가져야 한다.

에디가 떠나면 나는 지구상에 혼자다. 그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우리는 가까운 친구도 없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우리의 작은 집이 천국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모든 단순한 것들.

저 조용한 동반자는 잠자러 갔다. 그는 내가 글 쓰는 걸 미워하거나 내가 말하는 것에 참견하지 않는다.


2.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애니, 영화, 광고 속 장면으로 다양하게 패러디되었다.




 



 

 

 

 

 3. 사우디 정부는 아직도 여성들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9월호를 읽었다.

 

 

 

2015년에는 캘리포니아오징어의 알이 멀리 북쪽 알래스카 주에서도 발견됐다고 한다. 아열대 해양 동물인 개복치와 조개낙지와 청새리상어가 태평양으로 이동했고, 중앙아메리카의 바다뱀들이 LA 근처 해변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물을 찾아온 귀상어들이 캘리포니아주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영화 언더 워터(The Shallows)의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멕시코 해안에서 서핑을 하다가 난데없이 상어와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Surfin' USA가 명랑하게 울려퍼지는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단지 생태계 지도만이 바뀐 건 아니다. 크릴새우가 급격하게 줄어든 바람에 최소 10만 마리의 작은 아메리카바다쇠오리와 수십만 마리의 바다오리가 굶어 죽었다.

 

 

 

북동 태평양의 해수 온도가 기이하게 상승한 건 2013년부터이다. '블롭'이라 새로 명명된 이 수역에서는 약 2년간 생태계가 교란됐다. 많은 기상학자와 해상학자들이 기후 변화로 닥칠 미래의 바다를 이곳에서 예견했다. 따뜻한 기온으로 어류의 신진대사가 촉진돼어 식욕이 왕성해졌다. 먹잇감은 감소됐다. 먹이사슬 위쪽을 차지한 조류와 해양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고래와 해달 같은 동물들도 떼거지로 기이한 죽음을 맞이했다. 수심 깊이까지 높아진 수온으로 독성 해조류가 창궐했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신경독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의심하고 있다.

 

 

 

불과 한달 전 포털 한 켠을 소심하게 장식했던 뉴스 한토막이 떠올랐다. 한강을 녹차라떼로 둔갑시킨 유해 남조류는 내시와 사랑에 빠진 어린 왕의 순정한 눈빛 만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채 수심 깊이 가라앉았다. 혹독한 무더위가 몇 주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던 여름이었다. 녀석은 악랄한 고리대금업자처럼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가 전기세 고지서 한 장 던져놓고 떠나갔다.

 

2016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더위는 이제 물러갔다. 2013년 난데없이 시작된 북동태평양의 블롭 또한 강력한 엘니뇨로 약화되었다. 뉴욕 양키스, 요기 베라가 말했다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상한 나날은 이제 끝난 듯 보이나, 이제 막 시리즈를 기세좋게 열어젖힌 공포영화의 엔딩처럼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후속편은 언제나 강도가 더 센 장면들과 함께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상기온으로 나는 고작 몇 주 고생했을 뿐인데, 북동태평양의 해양생물들은 무려 2년이나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Into the Forest>는 종말에 가까운 세상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두 자매. 언니의 오디션과 여동생의 대학입학시험을 며칠 앞두고 미 서부지역에서 원인 모를 단전사태가 벌어진다. 곧 미국전역에서 발전소가 멈춘다. 모든 통신망이 단절된다. 유일한 이동수단은 자전거밖에 없다. 물자를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은 약탈을 일삼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사고로 죽는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기 전, 마치 동앗줄을 움켜쥔 것처럼 자매는 일상을 변함없이 이어나가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니는 매일같이 춤을 추고 여동생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우연히 초콜릿과 껌 두 개를 발견한다. 생애 마지막으로 맛보게 될지 모를 초콜릿 한 알. 그녀는 몇 번 언니를 건성으로 부르다가 아주 천천히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간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입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조금만, 아니 절반만. 그녀는 작은 초콜릿을 이로 살짝 깨물려다 멈칫하더니 그만 입 안에 넣어버리고 만다.

 

나는 바로 그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책장이 너무 빨리 넘어간다. <1Q84>로 이어지는 하루키의 원더랜드와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의 괴이한 실체가 모두 이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단편과 장편들에서 참으로 알뜰하게 재활용되고 확장되는 세계와 인물과 상징들.

 

언젠가, 아마도 곧, 무라카미 하루키 옹은 마지막 책을 내놓게 될 테지. 그때를 대비하여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들이 책장에 몇 권 남아 있다. (고백하자면, 재미없을 것 같아 남겨둔 책들이라는...)  






  열림원에서 출간된 책의 뒷날개에는 그의 당시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속 그는, 젊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젊은이처럼도 보인다. 



    어멋. 하루키에게 얇고 섬세한 속쌍거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을 아시는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다. 강우량 측정이 가능해진 이래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는 절대사막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 사막에는 2,000~3,000살로 추정되는 야레타가 있다. 얼핏 푸른 이끼 덩어리처럼 보이나 거대한 관목이다. 가지가 철수세미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그 위에 발 딛고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이며, 가지 끄트머리마다 푸른 잎들이 극도로 조밀하게 붙어 있다. 이것이 바위마저 깨트린다는 강풍과 극강의 추위를 견뎌내는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황무지 여기저기 무덤처럼 봉긋 솟아 있거나, 비정상적으로 몸을 부풀린 악성 종양처럼 돋아 있거나, 암석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듯이 번식한 사진들을 보면 외계 행성 어딘가에 불시착한 느낌마저 준다. 


이 기괴한 생김새의 미나리과 식물은 지구상에서 손 꼽히는 장수식물로서 일년에 1cm씩 자란다고 한다. 


불모지 같은 땅에서, 

여전히 살아 있고 아직도 크고 있다.


일년에 1cm.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들을 책장에 꽂다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려놓고 잊어버린 책을 발견했다. 안도현 에세이집 <그런 일>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배경의 힘으로 해오라기는 날아간다는 구절을 읽었다. 시인의 언어. 창밖을 바라봤다. 뒤로 물러설수록 희미해지는 능선들을 눈으로 좇았다. 녹음은 짙어지고 있을 테지만 가까이 가보지 않은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대기는 꽤 오랫동안 부옇다. 새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배경의 힘으로날아간다.’ 그렇게 격렬하게 부각되는 새들을 보고 싶다. 그런 새들은 여행자의 태도를 지녔을 것 같다. 시인의 말을 시각적으로 느끼고 싶지만, 저 창 너머로는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일 - 8점
안도현 지음/삼인


이편 하늘로는 철새 대신 군 헬리콥터들이 거친 굉음을 내며 지나치곤 한다. 며칠 전에도 세 대의 헬리콥터들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아이가 얼른 와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는 베란다에 서서 육중한 철갑 뭉치들이 세 개의 점으로 작아졌다가 이윽고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와 인근 도서관에서는 철새들을 해마다 볼 수 있다. 바람의 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곳을 비껴가는.


황량한 계절,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요란하게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얼른 창밖을 내다본다. 철새들은 V자 대형을 맞춰 날아온다. 불현듯 열이 흐트러지면서 선두가 바뀐다. 고도를 낮춘 채 비스듬히 선회하다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북쪽으로 날아간다.

연구에 따르면 철새들은 앞선 새의 날갯짓으로 생긴 상승기류를 타고 움직인다. 그렇게 힘을 비축하여 장거리를 이동한다. 리더는 제 힘으로 날아야만 한다. 경험 많고 힘센 리더그룹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어떤 철새들은 일렬로 날기도 하는데, 그런 새들 역시 동료의 날갯짓에 의존하여 에너지를 아낀다. 이들은 옆 동료와 엇박자로 날갯짓을 하여 난류를 일으킨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는 식탁에 기대선 채 찌개 끓는 소리를 들으며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쇠재두루미떼 이야기를 읽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멘트를 모은, 허은실 작가의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에서였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8점
허은실 글.사진/예담

 

겨울이 다가오면 그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를 넘어야 합니다.

게다가 그 산맥엔

이 세상에서 가장 춥고 날카로운 바람이 살고 있죠.

하지만 새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바람을 이기려고 할 게 아니라 읽어야

산을 넘을 수 있다는 걸요.

어느 순간 날갯짓을 멈추고 바람에 몸을 맡긴 두루미들.

그 바람이 가장 높이 자신들을 띄워 올린 순간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가장 높은 봉우리를 넘습니다.”

 

배경의 힘으로 날아가고, 동료의 날갯짓에 기대 힘을 아끼고, 바람을 읽어 산을 넘는 새들. 나는 그 새들을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을 넘는, 나날이다.



 

                        <배경의 힘으로 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배경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