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나는 계속 아팠습니다. 그 아픔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져 붉은 피가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숫자와 그래프로 증명되는 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호소할 수 없는 고통만큼 괴로운 것은 그것이 나를 고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의 첫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고 언젠가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때마침 자리를 비운 제3자에 대해 말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는데,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내가 바로 그 작은집의 맏이인데, 내가 모르는 다른 작은집 아이들이 있는 건가. '너희들'이라는 2인칭을 '작은집 아이들'이라고 3인칭화시켜서 표현한 것이 듣는 이의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배려인 건지 순화시켜 표현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청자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거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청자를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냥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바꿨다. 그때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게 억울했을까. 그 말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끝 쩌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의 맥락상 그 '약하다'는 형용사는 신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인 특성을 꼬집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약하다' 또는 '유약하다'이겠지.

 

  내가 봐도 큰집 아이들은 독한 데가 있었다. 큰애는 일찌감치 사시에 통과해서 두 아이를 시댁에 맡겨두고 지방법원을 돌고 있었고, 둘째는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넷이나 키우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뒤늦게 원하는 방식대로 살겠다고 철밥통 걷어차고 집에 주저앉은 꼴이었고, 남동생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모처럼 두 사촌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왁거렸지만, 그때만 해도 그 대화의 결론이 "작은집 아이들은 좀 약한 것 같다"는 게 될지 정녕 몰랐기에 "대단하네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 정녕 속없다. 역시 추석은 관계를 해치고 정신건강에 해롭다.

 

  하지만 그 말에 자존심을 다쳤던 이유는 그게 내 급소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촌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워낙 출중했다. 하지만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본 적은 없었다. 그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도 한 몫 했고, 결정적으로 워낙 기질이 달랐다. 말과 해마를 비교할 수 있나? 우리들의 부모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집'의 우리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그러니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큰어머니와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날아온 화살에 거의 절명할 뻔했다. 상처로 남은 건 그걸 상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나 또한 큰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난생 처음 맛보는 열패감과 무력감으로 어쩔줄 몰랐다. 내 선택에 대한 의심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가족 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내뱉을 때조차 내 자신이 징징거리는 것 같아 그 또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내가 남동생의 공황장애를 그저 연민으로만 껴안을리 만무했다. 남동생의 힘들고 괴롭다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한 신세한탄처럼도 들렸다. 내 자신과 남동생에 대한 그런 감정들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내가 감추려던 게 들통난 셈이었다. 그때 친정엄마가 옆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큰어머니의 말은 앞으로도 그냥 내 가슴에, 그리고 이 공개적 일기장에 묻어두는 걸로.

 

 

 

  김동영/김병수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제목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제목이다. 참 잘 지었다. 당신이라는 안정제...라니 시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나는 '힐링', '괜찮아' 류의 책들이 지겨웠다. '괜찮지 않다' '아프다' 그러니 그냥 '미워해도 돼' '원하는 대로 살아' 류의 책들도 지겨웠다. 그런 책들이 감성적으로 포장하고 심리학적으로 무장한 조언들이 허무하게 보였다. 책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이미 '괜찮은' 거다. 너무 아프고 아주 괜찮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은 소용없다. 그들에게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고, 이 책 또한 그저 값싼 위로의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애당초 생각했던 것처럼 이 책은 감성에세이가 아니었다. 우울증을 앓는 이와 그를 오래 상담한 정신과의 사이에 이뤄진 일종의 대화였다. 나는 작가 김동영의 용기에 놀랐고,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 한 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지금, 두 작가 모두에게 감탄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니까 내담자만이 아니라 상담자 또한 솔직하게 자신을, 자신의 상처와 괴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까발린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김동영 작가의 경우에는. 이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병에 지지 않을 것이다. 아픈 자신을 대면할 용기가, 그걸 다른 이들과 공유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상담의 또한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환자들의 '눈물 앞에 앉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걸 힘들어하는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한 채 '다시, 눈물 앞에 앉'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전하는 조언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아픈 사람은 정작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어쩌면 덜 아파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혼자만 아픈 건 아니라는 것을요. 모두가 같은 감정과 고통을 느끼며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그 말에는 좀더 밝고 건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다시 일상으로 그리고 나의 도시 서울로 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갇혀버린 저를 미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 옆에는 이런 날 그냥 지켜봐주고 마음 써주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으니깐요. 설사 그들이 제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겁니다.

 

건강하십시오.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세요. 힘들면 당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분명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겁니다. 만약 없다 하면 시들어빠진 꽃이라도 있겠죠. 그걸 통해 위안을 받으십시오. (p259)

                       

                                                                                                    - 김동영


창문도 없는 작디작은 이 진료실에서 팔 년을 일했다. 그동안 나는 달라졌다. 내가 그걸 느낀다. 감정이 새어나가는 느낌. 어느새 눈물도 말랐다. 어떻게든 내 진심을 전달하고 싶은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우울해서 무거운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아 무겁기만 하다. 마음이 멈춰서버렸다.

 

... 그냥 서글펐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더이상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슬펐던 거겠지. 변해버린 나란 사람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다시 출근. 비밀번호를 누르고, 연구실 문을 연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메일을 확인하고, 책을 잠깐 읽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아홉시다. 가운을 걸치고, 진료실로 내려간다.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다시, 눈물 앞에 앉았다. 이전처럼 나는 그들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 (p249)


                                                                                                       - 김병수




  '내 인생의 책'이라는 수사는 부담스럽지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내게는 그렇게 부를만한 책이다. 그 때문에 며칠 전 도서관에서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란 책이 반납함에 놓여있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페터 비에리의 필명이다. 나는 그가 소설 쓰는 언어철학자임을 진작 알았지만 그가 '내 인생의 책'의 저자임에도 그의 철학서(?)들은 찾아본 적이 없다. <자유의 기술>.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만 봐도 딱히 흥미가 일지 않았다.

  

  일단 그 책을 집어든 건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 때문이었지만, 내가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독일어 원제는 해석 불가. 영어 제목은 <Human Living: A Way of Dignity>. <삶의 격>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요즘 '존엄dignity'라는 말에 꽂혀 있다.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면 장소를 불문하고 울컥하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다. , 나이 탓인가. 훌쩍. 어쩌면 현실세계에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인지도. 그도 아니면 나 또한 강팍하게 살아가느라 '존엄성'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심리적으로 몰리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안정제'가 필요하다. 친정엄마에게는 "니 모습 그대로 족하다"고 말해주는 하나님이 '당신의 안정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이거나 친구일지 모른다. 내게는 대체로 책이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치료가 절실한 경우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이 경쟁사회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벼랑으로 모는 것 같다. 존엄성을 위협하는 사회, 직장, 학교, 가정, 관계들. 하지만 상담이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정신과의나 전문상담가를 만나는 일에 쉬이 발걸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삶의 격>에서 이런 일화가 소개된다. 작가 페터 비에리는 언젠가 약국에 갔다가 이웃이 정신병 치료 약품을 받아 가는 걸 보게 된다. 이웃이 창피한 듯 눈을 내리깔자 그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다. "저도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간이 안 좋다 뭐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머리니 신경이니 뭐니, 이러다가 당최 뭐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결국 커피를 마시러 간다. 그걸 계기로 종종 그들은 같이 커피를 마신다. 그는 이 일화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의 존엄성은, 내면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모래성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심으로부터 인간 사이의 연대감이라는 값진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p99)

 

작가는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치료를 받으러 가는 행위는 존엄성의 표출이며 상처 입은 허영심을 존엄성의 훼손이라고 오해하는 거짓 자존심을 거부한다는 단호한 표현이다.

 

  어쩌면 전문가들을 향한 '첫 발'을 떼기 어려운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안정제>'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공감받지 못해 고독한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유약하다'는 타인의 판단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두 저자는 따뜻한 ''을 내어줄 것이다내게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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